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죽음을 향해 예루살렘으로 당당히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합니다. 얼마만큼 내려놓아야 죽음을 담대히 맞이할 수 있을까요? 두려움을 넘어서게 하는 커다란 사랑의 힘 앞에 마음이 겸허해집니다.
안나 할머니는 몇 년 전부터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가입했던 상조회 보험이 만기가 되어 기쁘다고 합니다. 미사 예물과 장례식에 올 문상객 교통비까지 모두 챙겨놓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하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오라는 그날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소풍 가는 날처럼 기다리다가 홀연히 떠나고 싶다는 바람입니다. 얼마만큼 내려놓아야 안나 할머니처럼 죽음을 담대히 기다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이 살아계신 자녀들은 전화가 울릴 때마다 ‘혹시?’하는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어떠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지에 대해 부모님께 여쭤보면 왠지 불효하는 것 같아서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죽음을 잘 준비하기 위해서는 당사자도 보호자도 성숙한 마음이 필요하지만,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금기어처럼 생각하고 회피합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은 보낼 준비도 떠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아서 남아있는 사람에게도 고통의 아픔을 안겨줍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경이로운 체험을 했던 저의 할머니가 떠오릅니다. 할머니는 항상 새벽 4시에 일어나셔서 참빗으로 머리카락을 곱게 빗은 후 옷을 정갈하게 갈아입고 앉아 묵주기도를 오랫동안 바치셨습니다. 12살의 저는 매일 그렇게 반복하며 기도하시는 할머니께 “할머니, 무슨 기도를 바치시는 거예요?”하고 여쭈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가족들을 위해서도 매일 기도를 드리지만, 당신이 착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선종을 위한 기도를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어린 마음에 죽음은 나와 무관한 이야기처럼 느껴졌고, 선종이라는 단어도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오래전부터 삼베로 만들어 놓았던 수의를 햇볕이 좋은 날에 거풍시켜 다시 상자에 넣고 보자기로 곱게 싸놓은 뒤 선종을 위해 묵주기도를 바치는 할머니의 모습은 일상이었습니다.
가족들은 거실에 모여서 TV를 시청하고 있었는데, 당시 84세이신 할머니께서는 방에서 나오시며 뜬금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항상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형제들 간에 우애 깊게 지내거라. 나는 오늘 밤 자정에 하느님 곁으로 가니 잘들 지내라. 지금 가는 화장실이 마지막이 될 것 같구나.”
건강하신 할머니께서 갑작스럽게 이런 말씀을 하시니 ‘할머니의 덕담이 또 시작 되었나 보다’ 생각하고 각자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집집마다 있던 자명종 벽시계가 “땡!”하고 울리는 순간 약속이나 한 듯이 가족들은 할머니 방으로 달려갔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수의 옷을 곱게 갈아입고 누우신 상태에서 묵주를 손에 드시고 마지막 숨을 크게 내쉬고는 눈을 감으셨습니다. 눈앞에 벌어진 일이 사실임에도 가족들은 죽음의 시간을 예고하고, 수의를 스스로 갈아입고 죽음을 맞이한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놀라워서 슬퍼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단호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할머니께서는 지금 착한 죽음을 맞이하시어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셨으니, 할머니께서 바치시던 묵주기도를 우리가 바쳐드리자”하시며 묵주기도를 읊으셨고, 가족들은 할머니 주변에 둘러앉아 기도를 바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후에도 저는 요양원 소임을 하면서 연로하신 분들의 임종을 여러 번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돌아가신 마리아 할머니, 바람이 되어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다던 루치아 할머니, 허리가 많이 굽어 흉측하니 당신 염은 꼭 수녀님이 해달라던 안나 할머니….
수없이 기도하며 선종을 위해 준비해 왔던 어르신들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생애 마지막 순간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셨던 할머니들의 신앙은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저에게 깊은 깨우침을 전해주었습니다.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삶의 완결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