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지 주일과 함께 성(聖)주간이 시작됩니다. 사순절의 정점인 이 기간에 교회는 성삼일 전례를 통해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를 장엄하게 거행합니다. ‘파스카’는 ‘지나가다’라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죽음을 ‘지나서’ 부활에 이르신 사건을 파스카 신비라고 합니다. 파스카 신비에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사랑의 신비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분’(마태 5,45)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선포하신 바를 행동으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의인만이 아니라 죄인까지도 품어주십니다. 율법에 따라 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에게도 선뜻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봄바람이 얼음을 녹이듯이 따뜻한 자비로써 죄인의 마음이 변화되어 회개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으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사랑에 응답하여 모두가 형제자매가 되는 공동체를 이루기를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이 바람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백성은 예수님의 기적에는 열광하였지만, 회개의 요구에는 미지근하게 반응하였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율법을 무시한다고 비난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시려는 예수님의 의도와는 달리 예수님의 반대자들이 결집하였고, 이들은 예수님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쓴 잔을 안깁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쓴 잔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십니다. 제1독서의 말씀처럼 어떤 저항이나 원망도 없이 묵묵히 모든 모욕과 매질을 받아들이십니다. 마치 ‘너희들의 그 못된 증오와 폭력은 내게서 끝내도록 하라’는 듯이 말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십자가상에서는 자신을 못 박아 죽이는 이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느님께 청하십니다.(루카 23,34) 예수님은 당신 백성이 거부한 하느님의 깊은 사랑, 죄인까지도 품는 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심으로써(제2독서), 하느님 사랑의 심연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예수님이 죽음을 넘어 부활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매해 전례를 통해 파스카 신비를 거행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건너감’에 함께하기 위해, 곧 자신을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피하고 영광만을 추구하려는 이들, 반대로 세상의 고통만 확대해서 보고 부활을 희망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여,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며 기쁨을 누리는 신앙인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손희송 주교(서울대교구 총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