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15. 먹방
먹방이 큰 인기를 끄는 요즘,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는 하나의 오락 거리로 여기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음식을 먹는 행위는 하느님의 선물을 받아 섭취하는 거룩한 의식임을 기억해야 한다. 한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 기도를 하고 있다. ovs
음식을 통째로 들어 양손으로 찢고 입에 마구 쏟아붓는다. ‘쩝쩝’ ‘후루룩’ ‘아그작’ ‘벌컥’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짐승처럼 베어 물고 씹어 삼키면서 믿기 어려운 양의 음식을 한꺼번에 먹어치운다. 참으로 기이한 식성이다. 순간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위는 여물통’이라는 플라톤의 말이 떠올랐다.
지인의 조카가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먹방(먹는 방송) 유튜브를 한다고 한다. 월수입이 웬만한 직장인의 연봉을 훌쩍 뛰어넘는단다. 호기심에 바로 여러 영상을 찾아보았다. 엄청난 조회 수와 구독자 수를 보면서 과연 요즘 먹방 인기를 실감했다.
하지만 나의 눈에는 대부분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극단적 행위로 읽혔다.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학대하고 착취한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왜 우린 남이 먹는 것을 구경하고 싶을까? 그것도 기이하고 자극적인 폭식 장면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원초적 욕구인 식욕을 자극해서 외로움과 심리적 허기짐을 해소하기 위함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렇기에 먹방은 누군가 함께 밥을 먹는다는 기분 좋은 착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외롭고 고단하고 팍팍한지 이해되는 대목이긴 하다. 식욕은 본능이다. 맛있고 푸짐한 음식을 즐기는 식탐이 본능이라면 마음껏 먹는 것을 죄라고 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식욕과 식탐에 대한 무한긍정과 찬사를 보내는 현상은 왠지 불편하다.
내 인생의 타임머신을 돌려 행복했던 단 한 장면을 순간 포착한다면? 빛바랜 나의 유년 시절 온 가족이 올망졸망 모여 시끌벅적 밥 먹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가난한 음식이지만 어머니의 손맛으로 지금도 잊지 못할 평생 최고의 맛으로 나의 몸과 마음에 새겨져 있다. 심리학 교수인 서인국은 「행복의 기원」에서 ‘행복감이라고 할 때 가장 상징적으로 잘 담고 있는 장면은 바로 좋은 사람과 밥을 먹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뇌는 음식과 사람을 통해 행복감을 느끼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인류가 함께 일하고 소통하는 중심에 늘 음식이 있었다. 그렇게 사람과 함께 먹고 소통했던 뇌는 지금도 좋아하는 사람과 밥을 먹으면서 느끼는 행복감은 당연한 감정일 것이다. 음식은 미각뿐만 아니라 후각 촉각 시각 청각까지도 동원한 완벽한 오감에 대한 경험이다. 그러니 음식을 먹는 행위는 단순히 입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다. 정서적인 모든 것에 관여하는 활동이다.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는 엄마의 탯줄을 통해 숨을 쉬고 먹었다. 음식과 나는 서로 학습되고 강화되면서 지금의 나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어디서 내가 누구와 어떻게 무엇을 먹으면서 어떤 감정으로 그 음식과 사람을 대했는지가 곧 나의 정체성과 안녕감을 말해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구의 미래」에서 오늘날 우리는 음식에서 퇴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먹는 행위가 구경거리가 되고 걷잡을 수 없는 식탐을 부추기며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종종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음식의 양에 압도되어 먹는 행위에만 집중”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한다.
우리의 음식이 배고픔과는 멀어지면서 오락의 도구가 된 것일까. 영적인 삶을 추구하던 고대의 사막 수도승들의 음식을 대하는 태도는 언제나 ‘감사’였다. 필요한 만큼만 먹고 먹히는 것들에게 무한 감사를 보냈다.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은 동물이든 식물이든 또 다른 생명체의 죽음이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내가 전에 푸른 풀을 주었듯이, 이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준다.”(창세 9,3)
음식을 먹는 일은 하느님 사랑의 선물을 감사히 받아 섭취하는 거룩한 의식이다. 다른 생명의 희생으로 나의 생명이 유지되고 나는 또 다른 생명을 위해 살아야 하는 사명이 있다.
예수님도 음식을 사랑했다. 죄인들과 먹고 마시기도 했고 혼인 잔치에서 떨어진 술을 채웠고,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수천 명을 먹이기도 했다.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날 밤에도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열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빵을 떼어 나누면서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 결국, 예수님은 우리에게 먹히는 음식으로 ‘누구든지 먹으면 영원히 살 수 있는 빵’이 되었다.
영성이 묻는 안부
식욕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죠. 그런데 건강한 생존을 위해서는 몸만이 아닌 정신과 영혼의 건강까지 챙겨야 하겠지요. 마음이 아플 때 식욕이 떨어지기도 하고, 건강에 해로운 단것이나 탄수화물을 과잉섭취하기도 하잖아요. 배고프지도 않은데 음식 욕구가 올 때도 있고요.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못 느끼고 쉽게 다시 허기질 때도 있고요. 이럴 때 바로 마음에서 보내는 구조신호라는 것을 알아챘으면 해요. 음식을 먹기 전, 이 식욕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멈춰 묻기만 해도 진짜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