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7~1380년, 이탈리아 출생 및 선종, 교회 학자, 최초의 여성 교회 학자
가타리나 베닌카사 성녀는 1347년 주의 탄생 예고 대축일에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염색업을 하는 베닌카사 가문의 25명의 자녀 가운데 한 명입니다. 유난히 생기발랄한 성격을 지닌 가타리나는 아버지로부터 항상 점잖게 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불과 6살 때는 자신의 생애를 미리 보는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이에 가타리나는 자신을 결혼시키려는 부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정을 지키며, 오로지 기도와 단식에만 전념했습니다.
16살이 되던 해에는 도미니코회 제3회원이 됐습니다. 제3회는 세속에 사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특정 수도회와 연관을 맺고 그 수도회의 정신을 실천하는 단체입니다. 정식으로 수도생활을 하는 제1회(남자 수도회), 제2회(여자 수도회)와 구별하기 위해 제3회라 부르고 있습니다. 가타리나는 이후 명상생활과 병자 간호, 죄인의 개종에 힘썼는데, 특히 흑사병과 같은 절망적인 병을 앓는 환자들의 벗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종종 환시를 보았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한 손에는 가시관을, 다른 손에는 금관을 들고 나타나시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가타리나는 주저 없이 가시관을 택했다고 합니다. 1375년에는 피사를 방문하는 중에 오상 성흔을 받았습니다. 희미했던 이 상처는 임종할 때쯤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이러한 환시나 탈혼 등에 열광한 지지자들에 의해 곤혹스러운 일도 있었습니다. 협잡꾼이라는 의심을 사 고발되고, 도미니코회의 총회까지 출두했습니다. 당시 카푸아의 레이몬드 성인이 가타리나의 고해 신부로 임명되었으나, 이들은 곧 영적 친구가 되었습니다. 레이몬드는 후일 가타리나의 전기를 작성했습니다.
가타리나는 1376년 아비뇽의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에게 로마 교황청으로 돌아올 것을 간청했습니다. 교황은 이를 받아들였고, 로마로 돌아와 60여 년간 이어진 이른바 교황의 아비뇽 유폐 시대를 종식하고, 교황좌를 다시 로마에 복귀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1378년 그레고리오 11세가 선종하자 우르바노 6세가 교황으로 선출됐습니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일부 추기경들은 제네바의 로베르토를 대립 교황으로 선출했습니다. 교회에 큰 분열이 일어난 겁니다. 이때 가타리나는 단호히 우르바노 6세 교황을 지지하고 추기경과 제후들로 하여금 그에게 순종케 하여 분열을 종식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재물과 명예욕에 사로잡혀 사치 생활에 빠진 당시 교회 지도자들을 개혁하는 방법을 교황에게 제안하였으며, 자신의 신비적인 체험을 기록한 저서 「대화」에 약 400통의 서한을 남겼습니다.
가타리나는 1380년 33살 때 “주여 내 영혼을 당신께 맡기나이다”라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선종했습니다. 1461년 비오 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으며, 1939년에는 이탈리아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됐습니다. 1970년에는 성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아빌라의 대데레사 성녀와 함께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교회 학자로 선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