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그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요한 10,3)
성소 주일입니다. 사제, 수도 성소자가 꾸준하게 줄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여러 대책이 논의되고 노력을 기울이지만 별무신통입니다. 그렇다고 지나친 걱정은 금물입니다. 이 위기를 쇄신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겠습니다. 한 예로서 독일 교회는 이번 시노드를 마치면서 여성 부제 서품, 사제 독신 의무규정 완화 등 논란이 될 수 있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은 개혁안을 내놓았습니다. 새로움의 불림일까요? 어쨌든 지나친 사제 중심과 본당, 센터 중심의 사목에서 벗어나 대다수 교회 구성원인 백성들, 그리고 삶의 자리 쪽으로 중심 이동을 고민해야 하겠습니다. 복음화 사명을 수행할 교회는 세상 끝날까지 이어집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이끄실지 담대하게 큰 틀의 변화까지 감수한다면 좋겠습니다.
1. 목자 이전에 양
사제가 목자이고 평신도는 양인가? 아닙니다. 우린 모두 양으로 불리었습니다. 우린 모두 주님의 양입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어린 양’이었습니다. 주님 휘하에 착한 양이 될 때 그런대로 목자 노릇을 합니다. 무엇보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양육되어야 합니다. 그분 목소리가 귀에 익어야 합니다. 그분 체취 안에서 숨 쉬고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낼 것이고, 착한 목자이신 주님 흉내를 낼 것 같습니다. 교종은 착한 목자는 양 냄새 나는 목자라 했습니다. 양들과 함께 삶의 애환을 얼마나 많이 나누었을까요! 양과 목자의 친밀한 관계를 관상하시면서 나온 교종의 성찰로 보입니다.
2. 양과 목자는 서로에게 생명을 준다.
몽골에서 오랫동안 사목하고 있는 김 신부의 얘기입니다. 매서운 겨울 눈보라 폭풍에 양들이 우리 밖으로 나가 날뛰면, 양들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는 목동에 관한 뉴스를 왕왕 듣는다고 합니다. 목자가 돌보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어려운 양들입니다. 그렇다고 양과 목자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위해 수고하고 목숨까지 바치는 목자와 그 가족을 위해 양들은 언젠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습니다. 먹고 먹히는 살벌함이 아닙니다. 기꺼이 내어놓고 감사히 받아먹음입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는 먹히는 존재로 오신 주님의 성찬의 신비가 들어있습니다.
목자도 양들을 잡아먹습니다. 목자에게 먹히나 도둑, 강도에 잡혀서 먹히나 마찬가지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외양적으론 그리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들에게 목자는 안도와 구원 자체입니다. 잊지 못할 추억도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와 관련하여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 양을 광야에 놓아둔 채 찾을 때까지 찾아 나선다는 얘깁니다. 애타게 찾는 목자의 음성을 들었을 때, 길 잃은 양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입니다. 여기와 비교하면 도둑이나 강도에 대한 기억은 끔찍하기만 합니다. 어느 날 침탈당하여 팔리고 죽여집니다. 그들은 이름을 불러주지 않습니다. 이름을 모르는 낯선 이들입니다. 인격적인 관계와는 거리가 멉니다. ‘한 마리, 두 마리. 아흔아홉 마리, 어, 백 마리가 아니네!’ 양들은 오직 숫자로 파악될 뿐입니다.
신자 수, 헌금 액수, 재산 얼마 등 오직 숫자에만 관심이 있다면 강도나 도둑의 셈법에 빠진 것입니다. 교회가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목적 체험을 소중하게 여겨야 할 이유입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그 마음이 모든 이에게 다가가는 목자의 덕목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인류 사랑은 공상적 이론에 불과한 것에 비해 한 사람을 사랑하는 실천적 사랑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기에 가혹하고 두렵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사라지고 살아 있는 한 죽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는 뭔가를 해야 합니다. 서로에게 내어주고 또 받아들여 양과 목자처럼 공동운명체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영원을 사는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썩어 죽을 육신을 언제까지나 보존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