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373년, 이집트 출생 추정, 교회학자
아타나시오 성인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가정교육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성경과 신학 분야에서 뛰어났습니다. 318년에는 부제품을 받고 자신의 고향에서 알렉산데르 주교의 비서가 되었습니다.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했던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알렉산데르 주교를 수행해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아리우스주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4세기경의 이단 사상입니다. 3년 뒤 알렉산데르 주교가 선종하자 후임 주교로 선임됐습니다.
그러나 아타나시오는 곧바로 이집트 아리우스파의 심한 반발에 직면했습니다. 이러한 반발은 지중해 제국 전역으로 무섭게 파급됐고, 아리우스파를 지원하던 멜레티우스 이단도 덩달아 기세를 올렸습니다. 해당 세력들 뒤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지원이 있었습니다. 결국 아타나시오는 335년 독일 남서부 트리어로 첫 번째 유배를 가게 됐습니다.
2년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망하고는 콘스탄티누스 2세가 서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새 황제는 아타나시오에게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고 나서 다음 해에 교회 회의를 개최해 그의 직위를 복권했습니다.
그러나 반대파에 의해 아타나시오는 얼마 뒤 재차 추방됐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로마에서 7년 동안 머물러야만 했습니다.
346년부터 356년까지는 아타나시오에게 있어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주요 저서들 또한 이때 나왔습니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자인 황제 콘스탄티우스는 아타나시오를 추방하기로 하고, 군인들을 보냈습니다. 체포 위험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아타나시오는 이집트 사막의 은수자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기까지 자신의 교구민들을 지도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짧은 기간이지만 두 차례나 유배를 가게 됐고, 366년이 돼서야 선종까지 평화롭게 교구를 다스리며 사목할 수 있었습니다. 아타나시오는 저술과 강론을 통해 지난날의 갈등과 폭력으로 인하여 피폐한 교회를 재건하고 아픈 상처를 치료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아타나시오는 신체적으로는 작았으나 내면적으로는 매우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하고 파문하기로 한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실행하는 데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를 따르는 평신도들은 물론, 수많은 주교들조차 주저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아타나시오는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해 요한 헨리 뉴먼 성인의 말대로 “그리스도 교회의 거룩한 진리를 세상에 전해 온 사도들의 후예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또한 아타나시오는 역사적 가치를 지닌 저서를 많이 남겼습니다. 「안토니오의 생애」를 비롯해 성경 주석, 시편 주해 등입니다. 유배 중에는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보낸 해명」, 「수도자들에게 보낸 아리우스주의의 역사」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타나시오 신경」을 직접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아타나시오는 대 바실리오, 요한 크리소스토모·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성인과 함께 동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