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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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설립, 본당 승격 꿈꾸며 공소 봉헌

[공소(公所)] 16. 수원교구 향남본당 수직리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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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갓등이본당 관할 공소로 설립된 수직리 압실공소는 유서 깊은 교우촌의 신앙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공소이다. 수직리공소 전경.

 

수직리공소 교우들은 매주 수ㆍ금요일 대재와 소재를 철저히 지키고 신앙생활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공소 내부.

 


1830년대 이전부터 생겨난 경기도 남양도호부 신앙 공동체는 양간을 중심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선교 및 사목 활동이 더욱 발전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같이 유서 깊은 양간 교우촌 향남읍 수직리에 1894년 4월 압실공소가 설립된다. 오늘날 수원교구 향남본당 수직리공소다.

1894~1895년은 동학농민운동으로 경기도 일대 천주교 교우들이 많은 고초를 겪을 때였다. 압실공소 교우들도 마찬가지였다. 1895년 갓등이본당 알릭스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쓴 보고에 따르면, 동학군이 마을로 쳐들어와 총칼로 위협하고 천주교를 배교하라고 강요했다고 한다. 이에 압실 교우촌 최 필립보 회장은 순교를 각오하고 동학군에게 끝까지 신앙을 고백했다고 한다. 최 회장은 몽둥이질을 당했지만 그 외 별다른 피해 없이 동학군이 물러갔다고 한다.



새로운 갈등의 씨앗

동학군 습격 몇 해 전 갓등이성당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다. 1889년 5월 22일 갓등이본당 초대 주임 앙드레 신부가 본당 교우에게 피해를 입힌 김익제란 사람을 붙잡아 성당으로 끌고 와 감금해 버렸다. 이 사건은 김익제의 동생이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조선 조정의 외무독판과 프랑스 공사가 개입하는 외교 사건으로 확대됐다. 프랑스 공사와 블랑 주교의 주선으로 양측이 화해해 서울로 소환됐던 앙드레 신부가 그해 8월 다시 갓등이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선교의 자유가 확보되지 못한 상태에서 선교사가 신자들의 개인 문제에 직접 간여해 일어난 ‘교안’(敎案)이라 할 수 있겠다. 다행히 1901년 제주 신축교안처럼 무고한 희생자들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서양 선교사들의 도 넘은 위세와 일부 교우들이 선교사들을 등에 업고 저지른 폐악은 지역민과 늘 갈등의 불씨가 됐다.



확장하는 교세

앙드레 신부 후임으로 1890년 갓등이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알릭스 신부는 교회 재정 확보와 교우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경작지 매입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뮈텔 주교의 허락을 받아 1896년부터 1903년까지 조선대목구 소유지로 농지를 매입했다. 그는 매입한 농지를 교우들에게 경작을 맡기고 소출 일부를 그들의 생계비로 지원했다. 또 나머지 소출을 교구청으로 보내 대목구의 수입으로 쓰게 했다. 알릭스 신부는 교육에도 헌신했다. 본당과 관할 공소에 학교를 세우고 교리와 기초 학문을 지역민들에게 가르쳤다. 또 광성초등학교의 효시가 되는 삼덕학교도 세웠다.

알릭스 신부는 심한 이질로 오랫동안 고생을 하다 뮈텔 주교의 허락을 받고 프랑스로 귀국했다. 그의 후임으로 1897년 8월 페네 신부가 제3대 갓등이본당 주임으로 부임했다. 페네 신부는 김원영 신부와 함께 1899년 5월까지 사목하다 제주도로 부임했다. 이들 두 신부는 2년 뒤 제주 신축교안의 일부 원인 제공자가 된다. 신축교안으로 제주도에서 떠나야만 했던 김원영 신부는 새 부임지가 결정되기 전 1901~1902년 사이 양간 지역에서 사목했다. 1900년 선교지로 돌아온 알릭스 신부가 갈 곳 없는 김원영 신부를 갓등이본당 보좌로 요청했기 때문이다. 교안의 역사는 양간을 중심으로 이렇게 휘몰아쳤다.

갓등이 동남쪽에 위치한 압실공소에는 1911년 전까지 20여 명의 교우가 있었다. 이후 급속히 교세를 확장해 1910년대에 교우는 50명 이상이 됐고, 1920년대에는 40명 선으로 주춤하다가 1930년대에는 70명까지 늘어났다. 1931년 향남읍에 장짐이공소가 신설됐는데도 압실공소는 교우 수를 유지했다.

1894년 공소 설립과 함께 지은 공소 건물은 1949년까지 55년을 사용했다. 이후 6ㆍ25 전쟁 휴전 후 1953년 두 번째 압실공소 건물이 지어졌다. 당시 공소 교우들이 향남 증거리에 있던 마을회관 목재를 뜯어다 공소를 지었다고 한다. 1972년 압실공소 신자들은 직접 공소 건물을 지어 사용하다 땅 주인의 요청으로 반환했다.

 

 

 

 

향남본당 수직리 공소 교우들의 사랑방.


아직 이루지 못한 본당 승격의 꿈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초록로 862 현지에 지어진 지금의 공소는 1985년 네 번째로 지어진 압실공소, 곧 수직리공소이다. 200여 명의 공소 교우들은 유서 깊은 압실공소를 본당으로 승격하는 것이 숙원사업이었다. 교우들은 제대로 된 교회 건축물을 갖추고 있으면 본당 승격도 수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의기투합하고 공소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모은 돈이 1300만 원이다. 이 기금이 종잣돈이 돼 교구 지원금 600만 원을 합쳐 지금의 공소 대지 787평을 매입해 공사를 시작, 1986년 6월 29일 제2대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 주례로 공소 봉헌식을 거행했다.

안타깝게도 수직리 압실공소 교우들의 본당 승격 꿈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향남지역 개발로 2008년 향남본당이 신설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수직리공소 교우들은 1004만 원을 모금해 본당 회중석을 제작해 향남성당에 기증했다.

지금은 행정지명에 따라 압실보다 수직리공소로 불리는 이곳 교우들은 사순 시기마다 매일 십자가의 길 기도를 번갈아 가며 바치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또 주일 낮과 매주 수ㆍ금요일마다 대재와 소재를 철저히 지키고 있다. 지금도 수직리공소 신자들은 매주 공소 예절을 하고 있다. 발안본당 1호 사제인 송영규 신부도 수직리공소 출신이다.

강성국(요셉) 공소 회장은 “오산 비행장 때문에 고도 제한에 걸려 6층 이상 건물이 들어설 수 없는 곳이어서 수직리가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본당 승격은 못되어도 신앙적으로 아름다운 성당을 가꾸는 데 모두가 힘을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강 회장은 “지금도 판공성사 때면 공소 안에 자리가 없어 서 있을 만큼 교우들이 열심”이라며 “젊은이는 없고 연세 높은 구교우들만 공소를 지키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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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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