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우리는 ‘하늘로 오르시어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심판자로 오실 주님’을 고백합니다. 무덤의 부패를 겪지 않고 하늘로 오르신 분이 두 분 더 있습니다. 종말 때 나타나리라는 엘리야 예언자와 성모님이십니다. 주님의 심판대에 설 때, 엘리야 예언자가 검찰관 역할을 한다면, 성모님은 우리를 적극적으로 변호해 주실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주님이 하늘에 오르시는 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주님을 보고 제자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자신들과 멀어진다고 여겼을까요?
1. 승천은 역설적인 주님의 현존
주님의 승천은 세상과의 결별이 아닙니다. 주님은 땅에 존재하는 것들을 축복하고 들어 올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쏘아 올려진 인공위성이 지구 곳곳 모든 이들에게 소통의 도구가 된 것처럼 승천하신 주님은 세상 모든 이들에게 당신 구원의 빛을 보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승천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주님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주님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다.(에페 1,22 참조)
주님의 승천은 역설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사건입니다. 요셉 성인의 꿈에 나타나 천사가 들려준 전갈은 ‘임마누엘’이었습니다. 이 전갈로 요셉 성인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수 있었습니다. 천사가 들려준 임마누엘을 주님은 지상 삶을 끝으로 다시 한 번 굳게 약속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20절)
‘함께’는 한 공간에 얼굴을 맞대고 머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갓난아기는 엄마 품에서 태어나 자라고 어린이가 되어서도 엄마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점차 엄마를 모기지(母基地) 삼아 점차 행동반경을 넓혀 나갑니다. 나중엔 언제나 함께함을 믿고 독립하게 됩니다. 제자들도 밥상머리 양성과정을 마치고, 세상에 파견되어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안전장치로 주님은 보호자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그분은 주님이 언제나 함께하심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2. 선교 사명; 사랑의 신비 속에 잠기게 하라
승천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에게 천사들이 말합니다.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 우리의 삶은 주님 승천과 주님 재림 사이의 삶입니다. 삶에는 불림이 있고 그에 따른 사명이 있습니다. 주님은 승천 직전, 재차 사명을 확인해주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19-20절)
엄청난 선교 사명입니다. 세상 모든 이를 천주교 신자로 만들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명령한 계명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성삼위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의 신비 속에 모든 이들이 잠기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고백하는, 인류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당신이 받은 하늘의 모든 권한을 우리에게 주십니다.(18절) 의심하는 우리에게 맡기고 멀리 떠나가십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돌아와 셈을 하실 것입니다. 마태 25장의 탈란트 비유를 명심해야 합니다. 힘껏 노력하고 능력(탈란트)을 십분 발휘해야 합니다.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함께하시겠다’라는 주님을 믿고 과감하게 삶을 던져야 합니다. 셈을 바칠 (심판) 땐, 우리를 못내 사랑하시는 변호인 성모님도 계십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진다 했습니다. 용기 있는 자를 말합니다.
“승천하시어 하늘로 오르신 주님! 당신은 아니 계신 곳 없이 두루 계십니다. 당신의 염원도, 당신의 권한도 우리 것입니다. 당신의 사명도 우리 것입니다. 당신이 함께하심을 믿고 용기 있게 우리 삶을 던지겠나이다. 성삼위께서 보여준 사랑의 신비 안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을 사랑하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