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령칠은을 말합니다. 두려움, 효경, 지식, 용기, 의견, 통달, 지혜의 은혜입니다. 이중 근간이 되는 은혜는 두려움과 효경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두려움은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느낀 공포와는 다릅니다.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경외(敬畏)입니다. 하느님만을 두려워하면 모든 것에선 자유롭지만,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세상 모든 것에 겁박당합니다. 효경의 은혜는 그 두려우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은혜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입니다. 이 두 은혜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끄는 두 개의 수레바퀴에 해당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은혜를 청하게 됩니다.
1. 성령은 용서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가놓고 칩거 중이었습니다. 그런 그들 가운데에 주님이 오십니다. 평화를 빌어주시고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용서 없이 새로운 삶이 가능하지 않고, 평화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용서가 필요 없을 만큼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나약한 우리를 위해 주님은 약속하신 대로 다른 보호자 성령을 보내십니다. 용서를 통해 끊어졌던 관계는 이어지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태초의 창조는 이제 예수님의 숨결을 통해 새로워집니다. 성령 강림은 바로 이런 새로움의 시작입니다.
2. 제1독서에서 제자들은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복음을 선포합니다. 놀랍게도 여러 나라에서 온 이들이 자기네 나라말로 자기네 지방말로 알아듣습니다. 성령의 일치는 획일적이 아닌 다양성입니다. 이런 다양성은 모든 이들, 작은 나라, 약한 이들까지 아우르는 공동선을 위해서일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령에 관한 가르침을 줍니다. 그는 하나인 몸에서 여러 지체가 있듯이, 여러 은사는 모두 하나이신 성령의 일이라고 말합니다.(1코린 12,4-6) 여러 은사 가운데 가장 뛰어난 길을 보여주겠다며 13장의 아름다운 ‘사랑의 송가’를 들려줍니다. 이어서 14장에선 성령의 은사 가운데 예언의 은사를 구하라 당부합니다.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이는 자기를 위하지만, 예언하는 이는 교회와 사람들을 성장시키고 격려하고 위로한다는 겁니다. 누구보다 더 많이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자신이지만, 신령한 언어로 만 마디 말을 하기보다 이성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겠다고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 선포자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도 「복음의 기쁨」 마지막 장(제5장)을 온통 할애하여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선포자’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영으로 충만한 복음화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복음화입니다. 성령께서는 복음화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의 영혼이시기 때문입니다.”(「복음의 기쁨」 261항)
부활하신 주님의 인사는 평화입니다. 하지만 생전에는 여간해서 평화를 입에 올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칼을 주러 왔고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평화는 혹독한 십자가 여정 끝에 맺히는 열매일까요. 주님은 십자가상 희생 제물이 되어 세상의 모든 피조물과 화해를 이루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평화이시고, 우리는 그 평화의 증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당신이 채운다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우리도 세상에 무죄한 이들의 희생을 나누어 가지려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을 통해 세상의 복음화, 참된 평화에 대한 우리의 책무를 다져봅니다. “그리스도가 주는 평화는 세속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 현실을 외면하거나 현실과 타협함으로 얻는 안일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 속에 수난의 가시밭길을 거쳐서 얻어지는 부활과 그 부활이 주는 평화다. 그리스도인이란 인간과 인간사회의 참된 자유와 해방을 위해 자기 어깨에 십자가를 지고 역사의 한밤중에 어두움과 싸우며 빛을 향하여 전진하는 사람이다.”(「김수환 추기경 명상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