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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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글씨, 몸과 생각이 서로 바라보는 행위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22. 손글씨와 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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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사용이 일상화된 현대인들은 손으로 필기하는 것의 감각을 잃게 된다. 그럼에도 직접 쓴다는 행위는 지금의 나도, 과거의 역사도 생생함을 더해주는 몸에 저장되는 기억과 기록과 같다. OSV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소설가 김훈의 말이다. 연필로 쓰면 몸이 글을 느낀다는 것인데, 이 느낌은 과연 어떤 것일까? 몸에 새겨진 삶과 영혼의 이야기를 한 올 한 올 풀어가는 그런 느낌일까?

“… 이 아비는 現在까지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이 生命 다하도록 네가 훌륭한 修女가 되어 이 사회에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여 참된 修道者가 되어달라고 날마다 祈禱할 것이다.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것뿐이다.”

언젠가 책장 정리를 하다가 오래전 아버지로부터 받은 편지를 발견했다. 마음이 찡하고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노인의 향이 나는 옛 글씨체에 한자가 섞인 편지, 아버지의 침침한 눈과 손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손편지였다. 편지는 누렇게 낡았지만, 글씨체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였다. 세월이 흘러 내가 성장한 만큼 아버지의 글씨체도 더 큰 세상이 되어 돌아온 것 같았다.

처음 이 편지를 받을 땐 내용만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정갈하지만, 곧바로 내려오지 못하는 획에서 아버지의 숨결이 느껴진다. 글씨는 ‘마음의 거울’이라 했던가? 사랑표현 하나 제대로 못 했던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이 글씨에서 온기가 되어 전달된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편지가 컴퓨터로 출력된 것이라면 어떠했을까?’ 아버지만이 쓸 수 있는 글씨체가 아닌 누구나 받아 볼 수 있는 글씨체라면 내 마음이 이렇게 뜨거워질 수 있을까 싶었다. 그렇다면 내용만 읽고 덮었을 편지였을 것이다.

손편지나 손으로 쓰는 글 작업이 이젠 나에겐 까마득한 옛일이 되고 말았다. 언제부턴가 나는 무조건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얹어야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컴퓨터가 없으면 원고 한 장 제대로 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카드 한 장 쓰기도 힘들어졌다. 마음과 생각이 여물기 전에 키보드 위의 손이 먼저 움직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른 속도로 키보드 위를 오가며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 빠른 속도로 써내려가는 글이 마치 내 몸을 제치고 앞서 나가는 느낌이다.

컴퓨터는 ‘신체와 감각기능을 확장해주는 도구’(마샬 맥루한, Marshall Mcluhan)라고 한다. 내 몸의 속도보다 빠르게 일처리를 해주는 컴퓨터는 몸의 일부가 됐다. 빠른 속도로 썼다가 지우고 검색하고 복사하고 붙이기를 반복하면서 컴퓨터와 나는 하나가 되어간다. 때로는 컴퓨터가 주인이 되고 나는 끌려가기도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컴퓨터를 떠나면 내가 어떤 작업을 했는지 기억조차 없으니 말이다.

“책을 덮고 보니, 책 속에 머리를 놓고 왔구나”라는 윌리엄 스태포드(William Stafford)의 시 구절이 있다. ‘컴퓨터를 끄고 나니 컴퓨터에 머리를 두고 왔구나’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열심히 무언가를 작업하고 컴퓨터에 저장하는 순간 뇌는 더 기억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면 뇌는 쉬고 있을까? 또 다른 감각을 찾아 떠난다. 훑고 지나가는 숱한 정보의 홍수 속에 빠져 파도타기를 한다. 당연히 작업 기억의 용량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어 그 또한 기억하지 못한다. 몸과 생각이 서로 등을 대고 각자 쉰다고 느낄 뿐이다.

손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몸과 생각이 서로 바라보는 행위다. 몸의 속도를 느끼면서 몸이 밀어주는 대로 글은 앞으로 나아간다. 때론 침묵과 멈춤을 통해 익어가고 숙성되면서 몸과 마음 그리고 머리와의 속도를 적정거리에서 조정한다. 그렇게 기억의 조각은 뇌로 온몸으로 옮겨 간다. 가끔은 연필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천천히 나의 영혼에 호흡을 불어넣어 주듯이 그렇게 한 자 한 자 정성껏 써 내려가야겠다. 종이 위에 펜을 꾹꾹 눌러 천천히 써 내려가다 보면 기억의 뇌용량이 늘어나면서 집중력과 인내도 쑥쑥 자라지 않을까 싶다.



영성이 묻는 안부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저는 거의 매일 연필로 일기를 쓴 적이 있어요. 언어와 문화의 장벽 앞에서 몸부림치며 토해낼 수 있는 것이 일기였거든요. 연필로 일기를 쓰면서 저는 뜨겁게 하느님을 만났죠. 고통의 날에는 분노를, 고독의 날에는 외로움을, 슬픔의 날에는 서러운 감정을 마구 써 내려갔지요. 때론 성난 파도처럼 때론 부드러운 꽃잎처럼. 지금 돌아보면 그때처럼 깊이 저 자신을 성찰하고 주님과 마주한 적이 있었나 싶어요. 일기는 저의 간절한 신앙고백이었고, 동시에 영혼이 정화되는 기쁨을 선물로 받았지요. 비록 지금은 연필을 잡았던 손이 컴퓨터로 옮겨갔지만요. 그래도 저의 손에는 아날로그의 흔적이 남아있어 가끔 기억의 조각을 꺼내보곤 합니다. 새로운 변화, 그것은 옛것의 삭제는 아니겠지요. 몸에 저장된 것은 지워지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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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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