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 25)
저는 엄마 손잡고 나들이 나온 아이들을 보면 한참 동안 바라봅니다. 아무런 근심 걱정 없는 그 모습이 하늘나라를 떠올리게 합니다. 주님은 하늘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저도 하나 덧붙여 보고 싶습니다. “하늘나라는 엄마 아빠 손잡고 길 나선 철부지 아이와 같다.” 그 아이들에겐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엄마아빠와 함께라면 어딘들 못 가겠습니까?
1. 예수님도 철부지입니다.
예수님도 당신 자신을 철부지로 여기셨습니다. 철부지인 우리를 대표해서 감격에 찬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은 먼저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많은 은혜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불러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는 겁니다.
하느님은 왜 철부지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실까요? 기적을 많이 일으킨 고을들, 나름 똑똑하다는 이들이 회개하지 않자 주님은 한탄하시며 ‘철부지’를 언급하십니다. 안다는 이들, 똑똑하다는 이들은 자신들의 현명함을 믿습니다. 하느님을 믿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하느님은 철부지들에게 당신을 드러내게 됩니다. 역설적인 신앙의 신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은 복음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1코린 1,21) 우리는 하느님이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입니다. 사랑과 감사를 드려야겠지요.
2. 주님의 멍에냐 죽음의 올가미냐
주님은 당신의 멍에를 메고 삶을 배우라 하십니다. 멍에는 던져버리고 싶은 족쇄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유롭고 편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돈이 있으면 거의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맘몬이지요. 돈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닌데, 그것을 하느님처럼 여기면 부모 형제도 몰라보고 사람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죽음의 올가미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내적 기쁨과 참된 안식이 주어집니다.
신 요아킴 형제가 생각납니다. 고생을 많이 하신 분입니다. 삶의 마지막엔 암으로 고생하셨는데, 간병하던 부인이 그만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딸 역시 암 판정받고 엄마가 입원한 옆 병동에서 수술 대기 중이었습니다. 소식을 전해 듣고 착잡한 심정으로 전화했습니다. 뜻밖에도 요아킴 형제의 목소리는 밝았습니다. “신부님, 병에 걸리는 것도 삶의 한 과정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의 답변으로 제가 살아난 기분이었습니다. 임종 전에 다시 통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땐,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기쁨으로 들뜬 소년의 목소리였습니다. “신부님, 죽는 것도 삶의 과정이에요. 이제 아버지께 갑니다. 기뻐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형제에게는 살면서 겪게 된 시련이나 아픔 등 그것이 병이든 죽음이든 모두 아버지께 가는 삶의 한 과정이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이는 연이어 터지는 시련 앞에서도 요아킴 형제처럼 무너지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해 크게 염려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하느님의 도구로 여깁니다. 멍에와 짐은 고단하긴 하지만 사명을 이룰 때 으레 따라오는 수고일 뿐입니다. 철부지들이 그렇고 성인들의 특징입니다. 파안대소하시는 두봉 주교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우울한 성인은 없다고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는데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안식을 주시겠다고 거푸 두 번이나 약속하십니다. 안식은 그저 평안한 쉼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평화입니다. 태어났다면 살아내야 할 삶이 있습니다. 이왕 수레를 끌어야 하는 우리 삶이라면 아버지를 태우고 주님의 멍에를 메고 가는 것입니다. 힘이 들겠지만 기쁨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삶의 비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