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루가 3 11).
현재의 근본적인 생활의 조건들은 과거에 가난한 이들이 부자들 앞에서 구걸했던 시대와 아주 다르다.
군중이 세자 요한에게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어 봤듯이 우리도 물어 봐야 한다. 그 대답을 교회의 사회교리와 우리 현실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
우리 경제는 세계 13위 수준이지만 여전히 빈곤층이 많다. 이는 우리의 발전 계획 때문이다. 경제 성장 중심의 발전 계획으로 인해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나타난다.
1970년대는 도시 중심 정책 경제 성장 중심으로 농민 저임금 노동자 도시 빈민들이 빈곤층이었다. 80년대는 불량주택 재개발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이 쫓겨났고 이들이 더욱 생활이 어려워졌다.
90년대는 소비주의의 승리를 볼 수 있었는데 달동네 주민들은 재개발 사업에 따라 빈곤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흩어지게 됐고 「사회 안전망」이 생겼지만 다양한 빈곤이 계속됐으며 현재는 빈부 격차가 계속해서 심해지고 있다. 농가 부채 신용카드 부채 열등감과 우울증 자살이 이어진다.
최근에는 농촌 빈곤 청년 실업 증가 노인 빈곤 비정규직 근로자의 빈곤 신용 불량자 양산 빈부 격차 등이 주요한 빈곤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위험하고 어려운 노동 즉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한 희생」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소비주의를 거절하고 가정 성화에 애써야 한다. 소비주의 때문에 가정이 평화를 잃는다. 소비주의에 잡혀 있는 가정의 해방은 무엇인가?
올해 교구장 정진석 대주교는 사목교서에서 『교회는 가정이 「인간에게 봉사하는 공동체」 「믿고 복음을 선포하는 공동체」 「하느님과 대화하는 공동체」로 성화되어 가정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가도록 돕고자 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땅과 집에 대한 투기를 거절하자. 이것은 우리나라의 빈부격차를 더욱 심하게 만든다.
둘째 사회교리를 공부하고 잘 배우면서 봉사해야 한다. 빈곤과 정의의 문제는 단순한 자선으로 해결할 수 없다. 우리의 봉사는 충분한 지식과 지혜를 통해서 올바른 방향을 따라야 한다.
셋째 자선과 정의의 보완성에서 배우자. 자선이 왜곡되면 자선을 베푸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착한 사람 상대방을 불쌍한 사람으로 여긴다. 「불쌍히 여김」을 당한 사람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받으면서도 속이 상한다.
그런 경우에 자선을 베푼 사람이 정의에 대해 배워야 한다. 정의를 요구하는 사람은 자선을 베푸는 것을 배워야 한다. 잘 사는 사람들이 자선만 베풀고 가난한 사람들이 정의만 요구하는 세계의 모습은 복음화가 아직 안된 모습이다.
복음화된 사회에서는 잘 살든지 어렵게 살든지 모두 다 나누는 공동체를 만들도록 노력함으로써 정의를 구현하는 활동도 하고 남을 그저 도와주는 자선도 할 것이다.
박문수 신부(예수회)
정리=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