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인과 인사를 나누다가 마치 점을 빼주기라도 할 듯 다가서며 하는 말이었다. 순간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돌아서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예쁘게 치장한 여러 여성들을 만나고 난 후 바로 수녀들의 얼굴을 보면 잡티, 주근깨, 검버섯, 점, 주름이 눈에 확 들어올 때가 있다. 역설적이게도 본래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맨얼굴’이 낯설고 어색하다는 것이다. 요즘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본래의 얼굴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가보다. 피부 관리는 기본이고, 간단한 레이저 시술은 생활 에티켓이라고 하니 말이다.
“예기치 못한 일로 자정이 넘은 시간에 비상소집이 내려졌어요. 여직원들은 급한 나머지 맨얼굴로 나왔는데 무엇에 들킨 것처럼 부끄러워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구석에서 나오지 않는 거예요.” 한 공무원이 ‘지금 생각해도 정말 웃기다’며 코미디 같은 이 상황을 전해주었다. 그때 나는 “자기 진짜 얼굴이 부끄러운 거군요” 하며 농담처럼 씁쓸하게 툭 내뱉은 기억이 있다.
우린 더 이상 자연미를 찾을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자연은 보여주기 위한 것도, 사용되거나 수단도 아니라’고 한다.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주체의 정신이지, 그 자체가 아름답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외모도 아름답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평가대상은 더더욱 아닌, 오로지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나의 정신에서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심미안’이란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안목이다. 단지 예쁜 것만이 아닌 추한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끌어내는 안목이다. 스크린 속 화려하게 만들어진 연예인은 누구나 즉각적으로 “예쁘다”는 것을 알아본다. 굳이 “자세히 보지 않아도 오래 보지 않아도” 그냥 예쁘다. 그런데 심미안을 지닌 사람은 잡티와 점이 많은 얼굴에서도 추한 대상에게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아름답다고 말할까? ‘아름’은 옛말에서 ‘나(我)’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아름답다’라는 말은 ‘나답다’는 뜻이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잘 놀고 왔는데 마음 한구석이 구멍이 난 것 같이 허전하다. 최선을 다해 무언가 해내고 온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찜찜한 느낌이다. 가만히 돌아보면 내가 나답지 않게 말하고 행동하고 돌아설 때 그렇다. 우린 누구나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다. 이 욕구가 너무 크게 작용하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기질과 개성으로 행동한다.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웃고 말하고 행동하다 보면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쓰나미처럼 몰려올 때가 있다.
오늘날 미의 기준이 미디어 속 정형화된 ‘보이는’ 평가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 같다. 즐거움을 주는 만족의 대상으로 획일화되어가는 느낌이다. ‘미감’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의 그 자체에 집중하고 관조하면서 얻는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이다. 예술 작품을 바라볼 때 온전히 작품 자체에 집중하다 보면 나 자신이 사라지는 느낌, 미감이다.
하지만 ‘쾌감’은 나의 갈증을 채워주고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즐거움의 대상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최근 쾌감을 얻기 위한 아름다움의 기준은 ‘섹시함’으로까지 대체되고 있다. ‘섹시하다’라는 표현이 너무도 광범위하게 사용하다 보니 ‘매력적’, ‘좋다’, ‘멋지다’는 의미로 널리 쓰이고 있다. 섹시(Sexy)는 본래 성적 매력을 의미한다. 누군가는 성적 매력과 관계없이 그냥 좋은 의미에서 쓰고 있다고 하겠지만, 본래의 의미를 간과할 수는 없다. 성적 매력으로 아름다움의 평가기준을 삼다 보면 그 아름다움은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는 상품이 되고 만다.
아름다움은 나다움이다. ‘나다움’은 타인의 평가가 아닌, 주도적으로 찾아낸 아름다움이 나에게 부여한 선물이다. 추함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낼 줄 아는 심미안을 지닌 나다움이다. 나다울 때 아름답고 나다울 때 빛이 난다. 정말 그렇다.
영성이 묻는 안부
한 방송사에서 남녀 대학생들에게 이성의 사진을 나열하고 이상형을 고르는 실험을 했습니다. 놀랍게도 많은 학생들이 대부분 자신을 닮은 사진을 골랐지요. 그런데 그 사진은 다름 아닌 자신의 얼굴을 컴퓨터로 합성한 사진이었던 겁니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얼굴을 사랑한다는 실험 결과지요. 내가 나를 바라보면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남이 나를 본다고 생각할 때 상황은 달라집니다. SNS 세상에 내가 나를 전시하지요. 전시하는 순간 나는 상품이 되고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 아이들은 어떨까요? 자신의 신체 부위를 올려 ‘품평놀이’를 한다고 해요. 특정 신체 부위만 올려놓게 되면 그 부위는 ‘살덩어리’가 되고, 인격은 사라지죠.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예술 작품이나 자연 앞에 머물러 관조하고 성체 앞에서 묵상하는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관조와 묵상 경험에서 얻은 ‘미감’이 어떤 환경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안목을 키워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