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노도스’는 ‘함께’라는 접두사 ‘쉰-’과 ‘길’을 뜻하는 ‘호도스’가 결합된 단어로써 하느님의 백성이 함께 걸어가는 여정을 의미합니다. ‘시노도스’는 ‘시노두스’(synodus)와 ‘콘칠리움’(concilium)이라는 라틴어로 번역됩니다.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 문헌에 따르면, ‘시노두스’는 ‘시노드’로 콘칠리움은 ‘공의회’로 각각 번역됩니다. 정리해보면 현재 사용되는 ‘시노드’(시노두스)는 교회 역사 안에서 ‘공의회’(콘칠리움)이라는 단어와 함께 희랍어 ‘시노도스’를 가리켰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시노드와 공의회는 공의회적 회합을 가리킬 때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용어의 어원적 속성과 더불어 오늘날 시노드는 공의회와 구별되는 교회 제도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설명에 따르면 공의회는 의논하고 결정해야 할 중대한 사안이 있을 때 열리는 주교들의 회의로써 보편 공의회(세계 공의회)와 개별 공의회(지역 공의회)가 있습니다. 한편 시노드는 교회의 중요한 사안들을 논의하는 대의원 회의로써 주교 대표들이 참석하는 주교 시노드(주교대의원회의)와 교구 성직자와 평신도, 수도자 대표들이 참석하는 교구 시노드가 있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시노드와 공의회가 구별되는 지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생각해 본다면, 시노드와 공의회의 기원인 ‘함께 걷는’ 교회의 정신에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교회는 신앙과 삶의 의기를 초래하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성령 안에서 함께 문제를 검토하고 교회가 따라야 할 길을 모색하고 선포하였습니다. 시노드와 공의회에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 투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시노드와 공의회를 통해서 따라야 할 교리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참다운 교회의 모습이 갖추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물론 교회의 발전 과정에서 시노드와 공의회를 통한 고민과 노력이 언제나 열매를 맺은 것은 아닙니다. 특히 종교 개혁 직전에 열린 제5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교황 중심의 교계 제도가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이후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은 교황 중심의 가시적인 교계 제도 자체를 부정하고 순전히 영적이며 비가시적인 교회만이 참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제도적 차원을 전적으로 부정하면서, 교회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트렌트 공의회를 통해 교회의 제도적인 차원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 이후 시기는 하느님 백성이 함께 걸어가는 여정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가톨릭교회가 가시적인 교계 제도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분명해졌습니다. 성직자는 교회의 삶과 복음을 증언하는 능동적인 주체이고, 평신도는 이들의 지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교회 내에서 평신도의 역할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수동적으로 머물렀습니다. 하느님 백성이 교회의 삶과 사명에 있어 주체라는 인식이 후대에 가능해졌습니다.
시노드 정신을 일회적으로 끝나는 회의라는 차원이 아니라, 교회의 긴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백성의 구원 여정이라는 긴 관점에서 바라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종교 개혁 시기의 역사만 놓고 본다면 시노드와 공의회는 하느님 백성이 함께 걷는 여정이라는 근본 정신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를 거치면서 성직자 중심주의의 교회관에서 벗어나, 평신도의 능동성과 주체성에 주목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역사 하심 앞에서 겸손해지는 과정은 그 자체로 시노드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