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나이가 컨베이어 벨트 공장에서 온종일 부품의 나사못 조이는 일을 한다.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니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조이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게 된다. 급기야 그는 정신병원으로 내몰리고, 퇴원 후에도 떠돌이로 고달픈 삶을 이어간다.
돈과 기계로 얽어맨 미국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풍자한 1936년 찰리 채플린의 대표작 ‘모던 타임즈(Modern Times)’다. 자동화된 시스템 속에 죽어가는 인간성과 인간 소외의 문제를 빠른 속도의 팬터마임으로 표현한 블랙 코미디의 진수를 보여준 영화다.
생산성과 효율성의 상징인 컨베이어 시스템 앞에서 인간은 기계의 한 부분일 뿐이다. ‘자율’과 ‘의지’ 따위는 필요 없다. 나사 조이는 단순노동은 인간일 필요도 없다. 인간은 그저 로봇처럼 일하면 된다. 반복적으로 나사를 돌리기만 하다 결국 ‘돌아버리는’ 자본주의의 한계와 민낯을 보여주는 ‘모던 타임즈’에서의 가난한 노동자 채플린은 ‘차라리 감옥이 더 행복하다’고 외친다. 몸은 갇혀있어도 마음은 자유롭기 때문이다.
경쟁을 부추기고 희망도 꿈도 없는 자본주의 광장은 자유로운 것 같지만 공허하고 불안하고 위험하다. 산업사회는 그렇게 인간을 소비하는 굴레에서 끝없는 탐욕과 소유로 컨베이어 벨트처럼 한없이 돌아간다.
요즘도 심심찮게 ‘산업화’의 상징인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생사를 달리한 가슴 아픈 노동자의 이야기를 접한다. 어쩌면 평범한 우리네도 컨베이어 시스템에서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알람 소리로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한다. 신호등에 의해 멈추고 움직인다. 교통카드를 태그하고 들어간 지하에서 수많은 노동력을 실어나르는 지하철 속으로 들어가고 나온다. 출입카드로 출퇴근을 확인하고 사무실에 들어선다. 사무실이란 공간에는 나의 자유와 의지와는 무관하게 하루종일 대기 상태에서 컨베이어 벨트 앞에 앉아있는 노동자가 된다. 그렇게 쏟아부은 노동력으로 받은 대가는 내가 원하는 것을 소유하고 소비할 수 있게 해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성공은 자연스럽게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지위로 인식된다. ‘돈’은 우리가 믿는 ‘성공’의 조건이다. 물질의 소유와 사회적 지위로 인정받았을 때 ‘성공’했다고 믿는다. 소유와 지위가 개인의 정체성으로 이어지고 존재감으로 표현된다. 성공한 자아에 대한 느낌도 물질적이다. 시장의 조건에 맞춘 나라는 브랜드로 소유와 지위를 누리며 산다.
그래서일까? 초등학생들에게 꿈에 대해 물으면 적지 않은 어린이들은 ‘돈’을 벌어야겠다고 말한다. 돈이 목적이 되면 자연스럽게 자아는 도구가 된다. 글로벌 세상을 살지만, 모래알처럼 분리되어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 앞에 앉아있는 노동자처럼 말이다. 서로 연결되어 돌아가지만 내가 조여야 할 부품만 바라보듯 개인도 하나의 부품처럼 분리된 상태로 살아간다. 개인주의나 이기주의는 소유를 목표로 했을 때 따라오는 삶의 방식이다.
최근 한 청문회에서 30대 국회의원이 70대 장관 후보자에게 한 말이 기성세대인 나의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청년 예술가들이 국가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후보자의 말에 “요즘 젊은 세대들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같은 걸 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쩌다 태어난 곳이 대한민국인 거고 그렇다고 모두가 국가에 기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MZ세대답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국가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기회.’ 얼핏 들으면 지극히 당연하고 지당한 말로 들렸다. 하지만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자본주의적 시스템에서 자란 MZ세대에게 국가와 민족은 추상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글로벌한 세상이 하나로 연결돼 돌아가는 것 같지만, 철저하게 개인의 이익으로 얽혀있을 뿐이다. 연대하는 것 같지만 낱알처럼 흩어진 개인으로 기계 속 부품으로 살아간다. 그래서일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더욱더 외롭고 불안하다.
유사 이래 오늘날처럼 각종 불안증에 시달린 적이 있었을까? 극심한 불안과 함께 찾아오는 공황장애와 무기력증, 수면장애와 우울증 등은 현대인의 질병이고 마음의 병이 됐다. 서로 연대하고 사랑하고 희생하면서 극복할 수는 없을까? 인간을 소외상태로 몰아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은 없을까?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자본주의적 가치가 우상이 되어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변화는 바로 ‘종교적 회심’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컨베이어 벨트는 돌아가고 있다. 믿음의 결단이 필요한 시간이다.
영성이 묻는 안부
나 자신을 노동력을 뽑아내는 기계처럼 다루고 있지는 않나요? 노동력의 대가로 소유와 지위를 누리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두렵지 않나요? 노후가 걱정이고, 건강을 잃을까 두렵고, 죽음이 찾아올까 무섭고요. 그저 열심히 달려왔는데, 가족과 나를 위해 그렇게 분주하게 맹목적으로 일하며 살아왔는데, 지금의 소유에 만족할 수 있나요? 소유의 결핍이 존재의 결핍이 되니 공허하고 허망하기도 하지요. 진짜 행복은 어쩌면 물질주의를 극복해야 찾아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공이 나의 목적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라면 나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목적이 ‘돈’이라면 나란 존재는 돈을 모으는 도구죠. 돈과 명예를 벗어버려야 참된 행복이 찾아오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