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올해는 ‘성모님의 언덕’이라는 의미를 지닌 미국의 메리놀외방전교회가 한국에 진출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지난 5월엔 청주 내덕동 주교좌성당에서 100주년 기념미사가 봉헌되기도 했는데요.
지난 주말에는 메리놀회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 심포지엄이 서울 명동에서 열렸습니다.
심포지엄에선 메리놀회의 창립부터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진출의 의미를 되새기고 북한 교회사까지 아우르는 자리였습니다.
이힘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메리놀외방전교회는 1911년 6월 29일 당시 미국의 월시 신부와 프라이스 신부의 주도로 아시아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됐습니다.
1918년 중국 광동성과 광시성에 먼저 진출한 메리놀회는 1923년엔 평안도 지역에 진출하면서 한국 선교에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한국교회사연구소가 14일 서울 명동에서 개최한 국제 심포지엄에서는 메리놀회의 실립과 중국을 시작으로 한국을 거쳐 일본에 이르는 동아시아 선교에 나서게 된 배경과 업적, 시대상을 살폈습니다.
메리놀회 나현철 신부는 기조강연에서 메리놀회가 시작된 이유는 두 가지라고 강조했습니다.
백여 년 전 당시 1만 7천 명이었던 미국 사제 가운데 해외선교 사제는 겨우 16명이란 현실을 직시하게 됐고, 1905년 프랑스 정부가 정교분리법을 통과시키자 프랑스 교회의 활동에 제한이 생겨 선교사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일제의 종교정책이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을 앞당기게 됐다는 주장도 제기됐습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이민석 선임연구원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종교과가 신설되면서 미국 개신교 세력을 견제하고 통제하려는 정책에 따라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이 이뤄질 수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프랑스와 독일 선교사 중심이었던 한국 천주교회는 총독부가 영어에 농통한 일본인을 종교과에 배치해 미국 중심인 개신교와 협력이 늘어나자 일제의 종교정책에 대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이민석 대건안드레아 / 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
“(1920년대의) 대외의 흐름과 일제의 3.1운동 이후의 종교정책, 그리고 개신교와의 교세확장 싸움 이러한 연동 하에서 또 한편으로는 (총독부) 종교과의 신설이 메리놀회의 한국진출에 영향을 끼쳤다는 연쇄작용…”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일본 메리놀회가 한국 교회의 지형 변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역사적 사실이 재조명받기도 했습니다.
나가사키 외국어대 미야자키 요시노부 교수는 1930년대 일본에 진출할 당시 메리놀회와 일본 교회, 교황청간의 의견 차이로 인한 우여곡절을 겪은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교토를 일본인 방인 교회로 만들고자 했던 일본 주교와, 교토를 선교지로 위임받기를 원했던 메리놀회의 의견 충돌로 생각지도 못했던 평양지목구의 대목구 승격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미야자키 요시노부 교수 / 나가사키 외국어대>
“교토지목구의 설정에 관련된 과정을 주체자라고 할 수 있는 메리놀회의 사료를 통해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있었는데 한국 교회와 관련된 점에서 얘기하자면 평양지목구의 대목구 승격 관련된 얘기가 되겠죠.”
한편 심포지엄에 앞선 환영사에서 서울대교구 총대리 손희송 주교는 “평신도로 출발해 선교회의 진출로 꽃피우기 시작한 한국교회의 선교 역사를 돌아보고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애쓰신 은인들에게 감사드리며 새 새대 새 복음화, 북녘땅의 복음화를 기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심포지엄에는 메리놀회 부총장 제임스 린치 신부와 함제도 신부 등 메리놀회 선교사제, 평양교구 사무국장 장긍선 신부, 한홍순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 등이 참석했습니다.
CPBC 이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