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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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영적 세속성이 교회 안에 스며드는 것은 재앙”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42. 영적 세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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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세속성은 자기만족을 찾는 자아도취적 영성으로 사랑을 말하면서 사랑하지 않고, 십자가를 바라보지만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는다. OSV



“오, 가톨릭 신자군요.” 누군가의 손가락이나 손목에 묵주가 끼어 있는 것을 보면 반가워서 말을 걸게 된다. 그러면 돌아오는 말이 있다. “아, 기도는 잘 못해요.” 어쩌다 택시를 타면 운전석 위에 찰랑거리는 묵주나 십자가가 보인다. “신자이시군요” 하면 “아, 그냥 바라만 봐도 마음이 편해요”라며 성물을 지니고만 있어도 행운이 올 것 같고 안정감이 느껴진다고 한다. 거리를 걷다가 혹은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가끔 묵주 기도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모두 스마트폰 기기를 쥐고 사는 이 시대에 묵주 알 돌리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로또 맞은 것처럼 반가운 일이다.

묵주로 기도를 하든, 그저 소지하고 다니든 공통점은 성물에서 안정감과 평화로운 느낌을 얻는다는 것이다. 악을 물리치고 복이 찾아올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라고나 할까? ‘느낌적인 느낌’이란 말이 어법에는 맞지 않지만, 언제부턴가 참 많이 사용하고 있다. 기분이나 느낌이 중요한 시대에 이 말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어떤 느낌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지만, 그냥 너도나도 이해되는 그런 느낌이다. 굳이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냥 알 것 같은 기분과 느낌, 복잡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보다 좋은 느낌과 기분으로 살고 싶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폰 기기를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면서 기계에 예속되어 안정감을 찾듯이 우리 역시 묵주라는 성물에 예속되어 그 예속에 의한 ‘기분’의 덫에 갇혀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독일의 철학자 벤야민은 현대인의 지각 방식의 변화 중 하나가 예술작품이나 종교도 ‘관조’가 아닌, ‘기분 전환하는 오락’으로 수용되고 있다고 했다. 또 현대인이 즐겨보는 영화는 ‘충격 체험의 훈련장’이라고 했다. 엄청난 편집의 과정을 거친 빠른 속도의 영화는 잔인하건 자극적이건 폭력적이건 달콤하건 간에 팝콘을 먹으면서 즐긴다. 쉴새 없이 기관총으로 쏘아대며 피 터지게 구타하는 장면을 보고 나온 관객의 표정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나온 사람들처럼 흥분한 모양새다. “와, 정말 재미있다!” 모든 총평은 생각을 막는 마법 같은 한 단어, ‘재미’다. 무엇이 재미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느낌적인 느낌으로 그 기분을 이해할 뿐이다.

우리는 점점 리얼리티보다 리얼리티쇼에 더 재미를 느끼는 데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실제 상황에 참여하지 않아도 리얼리티쇼를 보면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하느님을 만난 체험과 하느님을 만나는 느낌은 분명 다르다. 기도를 하는 것과 기도를 한다고 느끼는 것과도 차이가 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주인공의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에 빠져 마치 내가 그러한 사랑을 한다고 느끼는 감정과 내가 실제로 그렇게 사랑하는 것과도 매우 다르듯이 말이다. 영화 속 성인이나 영웅을 엿보는 일은 참으로 멋지고 기분 좋은 일이지만, 진짜 내가 선교사가 되고 기부 천사가 되는 일은 정말 다르다.

어쩌면 우리는 기도하는 기분이나 느낌에 빠져 진짜 기도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여 묵주 알을 돌리고 기도하고 봉사활동도 하지만 나의 인내와 사랑 그리고 겸손과 평화라는 덕을 쌓는 노력과는 별개일 때가 있다. 사랑을 말하며 기도하는 입에서 한순간 이웃을 비난하기도 한다. 사실 디지털기기에 빠지는 것은 스마트폰이 꼭 유익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다만 디지털체험에서 주는 흥분과 재미라는 기분과 느낌에서 헤어나지 못할 뿐이다. 기도했다는 기분, 고해성사에서 용서받았다는 느낌, 신심 활동과 봉사활동으로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익숙한 감정을 얻어내는 그 기분과 느낌이 좋아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본다. 말씀을 묵상하고 성사보고 묵주 기도하고, 그리고 좋은 강사 찾아다니면서 영성강좌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 벅찬 기쁨도 누리지만 딱 거기까지라면, 우리는 영성을 쇼핑하는 사람이고 기도하는 기분과 느낌만 소비할 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물리적인 세속화보다 교회 내 ‘영적 세속화’가 더 나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영적 세속성이 교회 안에 스며드는 것은 재앙”이라고 경고한다. 영적 세속성은 자기만족을 찾는 자아도취적 영성으로 사랑과 행복을 상품 소비하듯 즐기는 모습이다. 사랑을 말하면서 사랑하지 않고 십자가를 바라보지만,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는다.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어 사랑하는 기분과 느낌만 소비한다면 이 또한 영적 세속화라고 할 수 있겠다.


영성이 묻는 안부

누구나 신심 깊은 좋은 신앙인이 되고 싶겠지요. 수도자인 저 역시 영성이 깊은 좋은 수도자가 되고 싶고요. 그러면서 저 자신에게 묻게 돼요. 그렇게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구체적으로 하고 있는지를요. 원하는 것과 사는 것의 간극이 큽니다. 어떻게 사람이 쉽게 변하느냐고요? 물론 쉽지 않죠. 아니 매우 어렵죠. 불가능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런 불가능을 체험해 본 적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을 만큼 노력해보았는데 안 돼!’라고 가슴 절절히 외쳐본 적이 있는지요. 위령 성월을 맞아 성경 한 줄에서 가슴이 움직인다면 바로 그 한 줄을 마음에 심어, 행동으로 옮겨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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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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