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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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사랑할 줄 알아야 연인도 사랑할 수 있다”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44. 디지털 사랑과 아날로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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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외모, 현실이 사랑의 기준이 된 오늘날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서로를 대할까.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면 그 마음이 산란해 하느님을 뵙기 어렵다. OSV


“라면 먹을래요?” 영화 ‘봄날은 간다’의 한 대사다. 라면은 뜨겁게 끓다가 식는 이별의 메타포로 작용한다. 빨리 끓고 또 쉽게 요리하는 라면은 간편하게 아무 때나 즐길 수 있는 음식이다. 적극적으로 다가갔고 차갑게 돌아선 여자는 아주 쿨하게 말한다. “헤어지자.” 그리고 수줍게 다가간 남자는 슬프고도 가슴 아픈 한마디를 던진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여자의 사랑은 원하면 시작할 수 있고 또 원하면 끝낼 수 있는 힙하고 쿨하다. 남자의 사랑은 절대로 변해서는 안 되며 지켜야 하는 순애보 사랑이다. 마치 여자는 디지털 사랑을, 남자는 아날로그 사랑을 표현한 것 같다.

디지털이 우리의 사고방식에 변화를 주었듯이 사랑하는 방식도 디지털적으로 변하고 있는 걸까? 아날로그는 신호를 분석하느라 반응이 느리다. 디지털은 0과 1만 받아들이면 된다. 아날로그는 신호에 잡음이 생기거나 신호 강도가 미약해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날 때가 있다. 디지털은 깨끗하고 확실하게 나오거나 아예 나오지 않는다. 흑백논리와 극단만 있다. 그렇기에 디지털 사랑은 ‘사랑’이다 싶으면 뜨겁게 불붙지만, 아니다 싶으면 한순간 차갑게 식고 흔적 없이 사라진다. 아날로그는 ‘사랑’인지 아닌지 파악하는데 다소 시간도 걸리기도 하고 이별도 ‘할지 말지’ 어중간하거나 애매하고 어설프기도 하다.

“이혼할 거예요.” A는 눈물을 흘리며 도저히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다고 하소연해왔다. 결혼 전의 남자와 지금의 남자가 달라도 너무 다르단다. 6년 동안 참고 참았지만, 남편과의 성격 차이로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다고 한다. 결혼소식도 들린다. ‘임신’ 때문에 서둘러 결혼하는 B의 소식을 전해왔다. “요즘 젊은이들은 사귄다 싶으면 속도전”이라면서 “하기야 살아보고 결혼하는 세상이잖아요”라며 씁쓸한 헛웃음이 전달되었다. 매년 이혼율은 증가한다. 사랑은 빠지는 것만이 아닌 지켜야 하는 것일 텐데 말이다.

최근 데이트 폭력이나 이별 범죄에 대한 뉴스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건강한 성에 대한 인식과 사랑에 대한 이해 없이 육체적 관계를 맺으면서 상대를 소유물로 여기는 왜곡된 감정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육체적으로 원한다고 사랑이라 착각하지 말라고 말한다. 성적 욕망은 탐욕의 일종이며 상대를 완전히 소유하려는 욕망이라는 것이다. 상대를 지배하려는 감정은 즐거움도 아니고 소유욕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자신의 소유물이 되지 않는 상대에 대한 원망과 적대감에 사로잡힐 수 있다고 지적한다.

프롬은 사랑이란 단순한 육체적인 관계가 아닌 온몸으로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생물학적으로 정자와 난자가 만나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듯 남녀가 만나 하나가 된다는 것은 정신적인 사랑을 통해 서로의 인격이 새롭게 탄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외모와 돈과 권력으로 원하는 사랑을 유혹하고 획득할 수는 있겠지만 어떻게 그 사랑을 지켜나갈 것인지가 더욱더 중요하다.

진정한 사랑은 수동적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하는 것’이고 ‘지키는 것’, 그리고 서로가 독립적으로 개체성을 보존하면서 통합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같을 필요도 없고 늘 같이 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 사랑은 지극히 독립적이고 또 상대가 완전히 다른 개체임을 인정해야 한다. 진정한 사랑은 그렇게 있는 그대로를 믿고 인내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깨끗하다는 것은 순결 혹은 청결을 의미한다. 마음을 깨끗이 비워야 평화와 고요가 찾아들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면 그 마음이 산란해 하느님을 뵙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미움과 질투를 ‘죄’라 여기고 고해성사로 마음을 청결하게 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마음에 품는 음욕은 어떠한가? 음욕은 성적 욕심이기에 대상을 순수하게 바라볼 수 없게 한다.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지 않는 마음에는 욕심이 깃들어 있어 평화가 흔들리고 기도하기도 어렵다. 세상은 점점 ‘순결’의 가치가 구시대적 퇴물로 전락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만큼은 ‘순결’이 하느님을 찾는 최고의 사랑이라고 한다면 고개라도 끄덕여 줄까?



영성이 묻는 안부

누군가 “음욕을 품고 여자 혹은 남자를 바라보면 이미 당신은 간음한 것입니다”(마태 5,28 참조)라고 말한다면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어찌 그리도 세상을 모르십니까?” 라고 빈정댈까요? 혹은 “그렇다면 간음하지 않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하고 반문하며 따지기라도 할까요? 어쩌면 우리는 음욕을 품는 문화에 익숙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혼외의 불륜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낸 영화나 드라마 속 이야기에 푹 빠져 살아가기도 하고요. 성격이나 경제 문제로 이혼하는 현실에도 익숙하고요. 사랑에 빠지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가능하지만, 사랑을 지키는 것은 배워야 한다고 하는데요. 어떤 사랑이 진짜 사랑일까요? 프롬의 이 말에 해답이 있을까요? “인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연인도 오롯이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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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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