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46. 분노 감정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좋아요’라는 긍정 중독에 빠져 살아간다. ‘아니요’, ‘싫어요’란 말을 듣는 순간 관계는 껄끄러워지고 불안하다. 사진은 영화 ‘The emoji movie’의 한 장면. OSV
“오늘의 저를 만든 에너지의 근원이 뭔지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화(火)’ 즉 ‘분노’였습니다.” 글로벌 그룹 방탄소년단을 키운 방시혁의 모교 졸업식 축사 일부다. 그는 자신을 화를 많이 내는 사람, 분노하는 사람으로 소개한다. 자신의 성공의 원천은 ‘분노’라면서 “여러분도 분노하고 맞서 싸우라”고 독려한다. 그는 적당히 일하는 무사안일, 비상식, 그리고 불공정거래 관행에 분노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그의 분노는 진행 중이란다.
그런데 화를 내다보면 오히려 에너지가 소진되고 우울하고 관계도 틀어지는 경우가 많다. 비상식이며 부당하다고 분노를 표출하면 묘하게 관계가 꼬이고 무엇보다 나를 좋지 않게 보리라는 불안감이 있다. 차라리 ‘좋은 것이 좋은 거여’라는 마음으로 적당히 타협하고 거기에 성과까지 올리면 나는 한순간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 된다. ‘옳지 않아’, ‘동의하기 어렵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자기주장을 하는 순간 함께하기에 부담되는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일까? 직장은 물론 성당이나 수도원에서도 점점 분노 감정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 같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분노 감정이 사그라지고 온순해져 간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어쩌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조율하는 험난한 과정보다는 차라기 내가 ‘적응’하는 것이 오히려 쉽고 관계 맺기도 수월하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현대를 살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좋아요’라는 긍정 중독에 빠져 살아간다. ‘아니요’, ‘싫어요’란 말을 듣는 순간 관계는 껄끄러워지고 불안하다. 반면에 나에게 ‘좋아요’를 눌러주고 하트를 날려주면 안정감을 느낀다. 우리는 매일 ‘고맙습니다’, ‘기뻐요’, ‘오늘도 해피데이’, ‘굿’, ‘최고’ 등 펄쩍펄쩍 뛰고 나는 이모티콘의 바다에서 과잉 긍정의 감정에 취해 살아간다. 손가락이 아프도록 스크린 터치를 하면서 나도 모르는 ‘동일성’에 훈련받고 있다. ‘알고리즘’의 편향성으로 ‘동일성’에 과잉접속하게 되고 나와는 생각이 다른 불편한 ‘타자성’은 차단한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조언한다는 것은 자칫 쓸데없는 참견이 되고 오지랖일 뿐이다. 게다가 충고까지 한다면 듣는 사람은 폭언처럼 느껴져 상처받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화가 나도 참고 감추고 숨기고 억압한다. 그렇게 우린 점점 활짝 웃는 이모티콘 뒤에 숨어 분노를 감추거나 잊고 살아가기도 한다.
분노 감정은 부당한 현재의 방향을 바꾸게 하는 신호다. 분노 자체는 감정신호일 뿐인데, 때론 공격성과 적개심을 드러내는 행동으로도 표출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스토아학파 철학자인 세네카는 정당한 분노는 없다고 한다. 분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없어서 그렇고, 화를 내다보면 습관이 돼서 그렇고, 자칫 폭력이 되고 잔혹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니 백해무익하고 인생에 도무지 도움이 안 된다고 한다.
하지만 분노에는 분명 의미 있는 정당한 분노도 있다. 서로 다른 것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표현되는 분노도 있고, 죄에 분노하고 사회정의를 세우기 위한 분노도 있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생활조건이 여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그다지 분노할 게 많지 않다’고 말한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굳이 투쟁하지 않아도 사는 데 전혀 문제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분노할 게 없는 이들은 안전한 곳에서 명상하고 수양을 하면서 폼 나게 살 수도 있단다.
하지만 ‘세상에는 분노가 유일하게 무기인 이들도 많다’고 러셀은 말한다. 그러면서 이들의 외침을 창밖에서 구경만 한다면 우리 사회는 건강하게 변화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시한다. 적당히 타협하고 적응해야 하는 조직 분위기는 누군가의 양보와 희생을 강요한다. 가짜 감정에 묻혀 가짜평화로 위장하기도 하고 때론 신경질이나 짜증, 우울감정으로 남기도 한다. 그러다 한순간 ‘폭로’와 ‘고발’로 쏟아져 나온다. 미투운동, 갑질고발 그리고 권력고발까지 폭로논쟁에 휩쓸리고 이제는 ‘폭로사회’라고 할 만큼 혼란하다. ‘좋아요’와 ‘싫어요’가 함께 손잡고 공존하려는 노력, 무엇보다 나와 다른 생각과 이념에 손을 내미려는 자세에서 변화는 시작되지 않을까 싶다.
영성이 묻는 안부
언제 행복감을 느끼시나요? 맛있는 것 먹고 잘 쉬고 좋은 사람과 만날 때 행복하지요. 하지만 안락한 우리 집 창밖을 내다보면 행복하지 않은 상황이 늘 존재하지요. 가까이는 내가 속한 조직에서 비상식을 넘어 몰상식과 부정한 관행들로 인해 상처받고 심지어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이 분명 있습니다. 또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권력자의 ‘복수’ 감정으로 인해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고요.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정당한 분노의 목소리를 내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상인들과 대사제들에게 채찍을 들고 분노하십니다. 겉과 속이 다른 종교지도자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 거침없이 질타하십니다. 함께 걷는 ‘시노달리타스’를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 한 스푼의 용기를 청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