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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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맞춤과 관조의 시선 속에서 행복의 꽃 피어난다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48. 관음(觀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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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사회는 몰래 보고 찍고 유포하는 몰카 범죄가 심각하다. 마치 몰카 무법천지인 관음(觀淫)의 세상같기도 하다. 픽사베이 제공


전철이나 공중화장실에 들어가면 ‘불법촬영은 범죄’이며 보는 순간 당신도 ‘공범’이라는 경고 글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경고판이 범죄심리를 차단하게 하는 효과는 있겠지만, 아무 생각 없이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언제 어디서 나의 신체 일부가 누군가에게 찍혀 유포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하다.

요즘 우리 사회는 몰래 보고 찍고 유포하는 몰카 범죄가 심각하다. 마치 몰카 무법천지인 관음(觀淫)의 세상 같기도 하다. 사실 우리 인간에겐 훔쳐보고 싶은 심리가 있다. 관음욕은 본능이며 원초적인 욕구라고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느 때보다 관음욕을 충족시키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는 대놓고 관음증의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또 익명의 가면을 쓰고 인터넷 서핑하면서 관음을 즐긴다. 소통창구가 된 SNS는 서로 훔쳐보고 훔쳐보기를 허용하는 관계망이다. 개인이 먹는 음식에서부터 사생활까지 노출시키고 서로의 근황을 훔쳐본다. 이러한 디지털 환경이 어쩌면 관음욕 확산에 기폭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18세기 영국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구상한 원형 교도소인 파놉티콘(Panopticon)은 높은 중앙탑에서 죄수들을 감시한다. 감옥에서는 감시탑을 올려다볼 수 없다. 그렇기에 내려다보면서 감시하는 교도관의 시선은 권력이다. 누구나 카메라를 소유하고 있고 무한 복제가 가능한 세상이다. 몰래 보고 찍고 또 복사하고 유포한다. 자신만의 ‘디지털 파놉티콘’에서 은밀하게 훔쳐보는 시선은 대상을 지배하려는 권력욕에 빠지게 한다. 다른 사람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훔쳐보고 카메라에 담아 소유한다. 카메라에 담긴 관찰 대상은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의 시선에 갇혀 지배당한다. 또 언제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유포되어 팔려나갈지 모르는 노예 같은 처지이기도 하다.

심리학적으로 몰카는 관음증과 성적 도착증의 일부다. 몰카는 한번 시작하면 도박처럼 멈추기도 어려운 일종의 질병이다. 모든 범죄가 그러하듯 그저 호기심에 슬쩍 훔쳐보는 가벼운 시선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다 충동적 행위로 이어지고 반복되면서 범죄자가 됐을 것이다. 훔쳐보기의 시선은 누군가에겐 폭력이다. 하지만 우린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평범한 시선을 가지고 태어났다. 유아는 태어나면서 거울 단계를 통해 자아를 인식하고 성장한다. 다양한 타인의 평가와 반응의 시선을 통해 자기를 바라본다. 시선과 시선의 만남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아이의 가장 든든한 힘이 되어주는 시선은 엄마의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눈길이다. 엄마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옥시토신이라는 행복 호르몬이 퐁퐁 솟아나니 말이다.

어느 날 유모차를 끌고 한 어머니가 전철 안으로 들어왔다. 유모차를 귀퉁이에 세우는가 싶더니 급히 스마트폰을 꺼내어 보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에 어머니의 시선을 빼앗긴 아이는 조금씩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머니의 손은 유모차를 흔들었지만, 시선은 그대로였다. 아이는 그것으로 만족할 리 없다. 결국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당황한 어머니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아이를 바라봤다. 비로소 엄마의 시선을 차지한 아이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잠시 서로를 응시하는 아기와 엄마의 눈맞춤, 관조의 시선 속에서 행복의 꽃이 피어나는 것을 잠시 훔쳐본 시간이었다.

관음욕이 확산하는 디지털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관조(觀照)의 시선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시선을 디지털 스크린에 빼앗겨 살아간다. 관음하고 즐기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다. 감각적이고 흩어지고 산만하다. 서로의 존재에 깨어 마음을 모으고 집중하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짧은 순간이라도 몰입하며 서로의 존재에 머물게 해주는 관조의 시선으로 눈과 눈의 만남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서로 서로의 존재에 머무는 눈맞춤에서 오는 충만한 행복 체험이 필요하다. 관조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의 존재 앞에 서게 한다. 그리고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관음의 시선에서 조금은 거리와 여백을 만들어준다.


영성에게 묻는 안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두꺼운 벽을 치고 높은 담을 쌓고 이웃과 차단하고 살아가지요. 그런데요. 이상하게 벽 너머로 들려오는 이야기와 담장 너머 사람들의 일상을 훔쳐보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다는 거지요. 고급 아파트의 고층이 비싼 이유 중 하나가 조망이 좋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려다볼 수 있는 시선이 부(富)이고 권력이기 때문이겠죠.

우리의 시선, 안녕한가요? 따뜻한가요? 진심은 담겨있나요? 불편한 눈길을 준 적은 없나요? 단정과 무시의 눈길, 경멸과 무관심의 눈길로 바라본 적은 없나요? 잠깐 우리의 시선을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에 멈춰 머물러 보면 어떨까요? 고요한 마음을 열어주었다면 관조의 시선으로 바라보았겠죠. 그 시선으로 매일 만나는 가족과 하루에 1분이라도 침묵 중에 눈 맞춤을 하신다면요? 아마도 관조적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시선으로 ‘하느님의 본성을 관조한다면 영원히 행복한 길’(아리스토텔레스)로 들어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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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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