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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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예수는 왜 초라한 마구간의 ‘삼모’로 오셨을까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49. 삼모(三毛)와 아기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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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와 스크린 속 가난을 '관람'하는 것에 익숙한 우리는 가난도 '전시'되어야 잘 보이는 현실을 살고 있다. 행인이 거리의 노숙인 옆을 지나고 있다. OSV

고아 소년 삼모(三毛)는 갈 곳이 없었다. 정처 없이 떠돌다 보니 허기졌다. 끼니라도 때우기 위해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에 앉아 ‘만 원에 팝니다’란 푯말을 들었다. 부자가 자기를 사가면 밥이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삼모를 거들떠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엄마와 함께 인형을 사 들고 가는 어린아이의 품에 ‘십만 원’이란 가격표가 삼모의 눈에 커다랗게 들어온다. 점점 바람은 거세게 불어온다. 낡고 얇은 티셔츠를 입고 있는 삼모는 추워 발을 동동거리며 뛰어간다. 그러다 쇼핑몰 화려한 쇼윈도 안에 비싼 가죽옷을 입고 서 있는 마네킹 앞에 멈춘다. 삼모는 추위도 모르는 마네킹에게 입힌 따뜻한 옷을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는데, 개가 요란스럽게 짖어댄다. 두툼한 털조끼를 입은 애완견이다. 허기진 배에서 뜨거운 분노가 끓어오름을 느낀다. “나는 개만도 못한 존재구나.”

오래전 읽었던 중국의 화가 장락평의 ‘삼모유랑기’라는 만화에서 기억나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재구성해 봤다. 작가는 중국 전역을 다니면서 잔혹한 사회 현실 속에 내버려진 수많은 고아들을 만난다. 그리고 이 아이들을 머리카락 세 가닥만 있는 소년, ‘삼모’라 불렀다. 불공평한 세상을 폭로하고 비판하면서도 끝까지 인간 내면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은 작품으로, 전 중국인들에게 사랑받았고 애니메이션과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런데 오늘날 아직도 우리 주변에 삼모는 있긴 할까? 오래전, 그것도 중국이란 나라에만 존재하던 삼모였을까? 최근 전쟁이나 분쟁, 기후 변화로 굶주리는 기아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1분 48초마다 한 명의 어린이가 물이 없어 목숨을 잃는다는 월드비전 통계 보고(2021)도 있다. 우리가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고르는 그 시간에도 깨끗한 물이 없어 아이들이 죽어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가난’은 그저 통계나 미디어 속에만 있는 걸까? 빈곤 아동, 빈곤 청년, 빈곤 노인에 대한 자극적인 뉴스는 종종 보지만, 대부분의 많은 ‘가난’은 그저 스크린 속에 갇혀있는 듯하다.

언젠가 필리핀에 살던 한 지인의 말이다. “처음엔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빈민들을 보면서 머리가 아프고 미칠 것 같았는데요. 마닐라 도시 중심으로 이사 간 이후 보이지 않으니 마음이 편해졌어요.” 보이면 힘들고 안보이니 편하단다. 보는 것은 선택적 행위다. 원하지 않는데 보이는 불편한 현실은 피하고 싶다. 우리는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면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에 익숙하다. 언제나 안전거리가 확보된 미디어 속 세상이다. 어쩌다 가끔 거리에서 ‘삼모’를 만나면 때론 무심하게, 또 때론 의도적으로 외면하기도 한다. 안전거리가 없어서 불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크린 속 ‘가난’ 앞에는 멈춰 동정하고 ARS 후원을 신속하게 보내기도 한다. 연출의 힘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리얼리티를 만들어낸다. 무엇보다 거리가 있어 적당히 연민을 가지고 볼 수도 있다. 스크린 속 ‘논픽션’은 ‘픽션’으로 다가와 불편한 ‘가난’도 더 시선이 가고 흥미를 느끼게 한다. 관람하는 것에 익숙한 우리는 가난도 ‘전시’되어야 잘 보인다.

가장 부유한 동네 강남에도 판자촌이 있다. 한국의 불평등을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보여준 ‘오징어 게임’ 덕분에 더 유명해진 동네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로 알려지면서 직접 관람하기 위해 외국인 관광객이 한때 몰려왔다 하니 놀랍고 화가 나고 슬픈 일이다. 졸지에 빈민촌이 관광지가 되었으니 말이다.

‘삼모’는 어디에 있을까? 가난은 군집을 이루기보다 낱낱이 개체로 고립된 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흩어진 가난은 잘 보이지 않는다. 보여도 미디어 속 강렬한 ‘가난’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평범한 일상의 한 조각일 뿐이다. 빈곤이 사라져서가 아니다. 모양과 소리가 달라졌다. 서울 도심에서 ‘고시원’이라는 간판을 쉽게 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도 철저히 고립되어 살아간다. 하루종일 지하철 안에서 에어컨과 히터를 쐬려고 시간을 보내는 수많은 빈곤 노인들, 비가 새는 단칸방, 곰팡냄새가 나는 지하나 옥탑에 사는 주거 빈곤 아동들은 중산층의 일상에 융해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바로 내 앞에 ‘삼모’가 있는데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다.


<영성이 묻는 안부>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관람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고 계시나 봅니다. 그렇기에 폼나게, 멋지게 슈퍼스타처럼 짠하고 나타나셨다면 우리는 입 벌리고 구경만 했으리라는 것도 아셨을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하느님은 힘센 기사도, 잘난 학자도, 돈 많은 재벌도, 잘난척하는 어른도 아닌 허약한 어린 ‘삼모’가 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초라한 마구간을 그의 첫 무대로 선택하셨고, ‘삼모’로서의 여정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삼모’로 이 세상에 오시어 지금 우리에게 빈방을 청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빈방에 가구와 소품들이 가득 차있다는 핑계를 대려고 합니다. 반려견이 사용하고 있고, 화초와 장난감으로 채워져 있어 방이 없다고 거절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동정심에 혹은 죄책감에 지갑의 돈 몇 푼, 빵 몇 조각 주고 빨리 보내려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곤 우리는 여전히 커다란 방, 침대에 누워 TV에 나오는 ‘삼모’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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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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