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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꿈 CUM] 귀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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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월성 성당 성모상


분주히 쌀을 찧는 중에 갑작스레 신부님께서 방문하셨다. 군 생활 중 소속 부대에 부임하신 것을 계기로 20년 넘게 뵈어 온, 언제 오시든 반가운 귀한 손님께 정미소를 안내해 드렸다. 38년 군 생활을 마치자마자 불현듯 귀향해 농업법인을 차린지라 놀라셨을 법한데도, 신부님께서는 담담히 둘러보시고 축복해 주신 뒤 순례길로 표표히 떠나셨다. 가벼운 행색으로 먼 길을 나서시는 신부님의 뒷모습에, 지난 몇 달 동안 묻어 둔 조바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늘 마음에 그리던 고향에 돌아와 사업을 일으켰을 때 주변에선 섣부른 도전이라며 염려 어린 시선으로 만류했지만, 나고 자란 생가를 떠나 상경했던 초등학생 시절부터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와 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에 주저 없이 귀향할 수 있었다. 좌초될 만한 위험도, 마음이 꺾일 뻔한 일들도 더러 있었지만 고향의 부흥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리라는 마음으로 쉴 틈 없이 몰두했고, 주변의 축복 덕에 회사도 2년여 만에 그럭저럭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작게나마 정미소를 얻어 쌀을 도정하고, 땀 흘려 기른 과일들을 크게 욕심부리지 않은 가격에 팔아, 꿈인 동시에 욕심이었던 일에 동참해 준 고마운 직원들에게 월급봉투를 들려줄 수 있었다.

은퇴 후의 노후를 즐기는 것이 마땅할 나이에 사회 초년생 못잖은 포부로 누구에게든 주눅 들지 않고 자신 있게 청사진을 꺼내왔지만, 신부님 앞에만 서면 할머니 몰래 간식을 먹다 들킨 아이처럼 겸연쩍은 표정이 된다. 얼마 전 성당 봉사직을 거절했던 까닭이다. 아직은 사업에 보다 집중하고, 후에 결실을 얻으면 보다 여유로운 상태로 유용하게 봉사하리라며 진심 어린 마음으로 사양했지만, 그날부터 마음에 새로운 채찍이 생겨났다. 쾌락을 좇기 위해 신앙을 소홀히 했다면 고해로 마음이 가벼워졌을 것을, 고향의 부흥과 더 큰 봉사를 위해 마다한 책임이 오히려 죄책감처럼 무거운 짐이 되었다.

한 포대의 쌀을 정미하기 위해서는 이른 봄부터 땀을 흘려야 하고, 달콤한 과즙을 머금은 복숭아를 한 아름 따기 위해서는 한여름 땡볕을 감수해야 한다. 당장은 한 톨의 쌀에 정성을 담는 데 진력하겠다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기도를 올린다. 주님, 미약한 제가 신부님의 사목과 교회의 번창에 일조할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글 _ 류성식 (스타니슬라오, 전 육군 부사관학교장, 수원교구 반월성본당)
1979년 소위로 임관한 후, 2012년 제30기계화보병 사단장, 2013년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2014년 육군 부사관학교장을 지냈으며, 2017년 전역했다. 이후 귀향해 농업법인 (주)일팔구삼을 설립, 햇사레 복숭아, 포도, 사과, 이천 쌀, 꿀 등을 농작하고 유통하고 있으며, 지역 사회를 위한 율면 장학회를 설립하는 등 행복한 제2의 인생을 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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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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