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꿈 CUM] 삶의 길 (11)
혹시 ‘유행’의 본질을 아십니까? 유행이란, 남과는 달라야 된다는, 남보다 튀어야 된다는 차별의식에서 나옵니다. 남과 다르게 보이고 싶어서, 남보다 높아지고 싶어서, 남보다 뛰어나야 만족하는 차별의식, 이것이 유행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텔레비전 광고물들은 바로 그 심리를 파고듭니다.
“이것을 입으십시오! 이것을 바르십시오! 이것을 갖추고 사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돋보이고 높아져 보일 것입니다!”
내가 높아지려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당연히 낮아져야 합니다.
나 외에 다른 사람은 모두 별것 아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다른 사람을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고 나 자신은 한없이 높아져야만 속이 풀리는 인간의 그 차별의식을 이용한 것이 유행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이 ‘높아짐’의 ‘높’자를 살펴봅시다. 이 ‘높’자를 거꾸로 하면 무슨 글자가 됩니까? ‘푹’자가 됩니다. 높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잃고 푹 꺼질 것입니다. 자신을 돋보이고자, 자신을 남보다 높이고자 다른 사람을 낮추고 별것 아닌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잃고 푹 꺼져버려 고독에 몸부림치게 될 것입니다.
‘겸손’이라는 영어 단어는 ‘Humility’ 입니다. 이것은 라틴어 ‘후무스’(Humus)에서 유래합니다. Humus는 ‘땅’ ‘흙’입니다. 곧 겸손은 땅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땅은 낮은 곳에 있습니다. 따라서 겸손은 땅처럼 낮은 데로 가는 것입니다. 땅처럼 되는 것입니다.
유행의 본질이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고, 뛰어나려고 하는 교만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겸손은 모든 사람의 발밑에 말없이 누워있는 땅과 같이 낮아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교만이라는 유행이 높은 빌딩을 짓는 것이라면, 겸손이라는 미덕은 낮아져 땅과 같이 되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교만이라는 유행은 자꾸만 높아져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외로움의 감옥에 자신을 넣는 것이라면, 겸손이라는 미덕은 자꾸만 낮아져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 땅과도 같은 사람들을 가슴 가득 얻어 만나는 풍요로움의 잔치와도 같습니다.
땅은 언제나 우리를 떠받치고 서 있으며, 우리가 필요 없다고 버리는 쓰레기들을 말없이 받아 안고 그것을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며 다른 사람이 필요 없다고 버리는 쓰레기들, 영혼을 더럽히는 쓰레기들, 다른 사람에게 옮기면 또다시 싸움이 일어나게 될 몹쓸 말의 쓰레기, 몹쓸 행동의 쓰레기를 받아안고 그것을 삭힙니다. 그리고 다른 생명의 모습으로 변화시킵니다.
교만이 이 세상을 쓰레기로 만들어 가진 자, 잘난 자, 강한 자 만이 살아남는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만든다면, 겸손은 썩은 이 세상을 치유하는 약입니다. 겸손은 모두가 한데 어울려 사는 참된 평화의 왕국을 건설하는 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교만으로 하느님을 잃어버렸다면, 교만한 사람들이 높아지려고 바벨탑을 쌓다가 결국 모든 것을 잃고 푹 꺼져 버렸다면, 겸손은 잃어버린 하느님을 발견하는 길입니다. 높은 데서가 아니라 낮은 데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교만이라는 유행은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이웃도, 하느님도 잃을 것입니다. 그러나 땅처럼 낮아지는 겸손한 사람은 땅이 하늘을 모두 담아내고 있듯이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 이웃도, 참된 사랑과 우정도, 하느님까지도 말입니다.
교만에 빠져 허리를 낮추지 않고 하늘만 쳐다볼 때 우리는 결코 우리 곁에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남들보다 언제나 높아지려고, 남들보다 언제나 뛰어나려고 하는 사람은 하느님도, 이웃도, 참된 우정도, 사랑도, 모두 잃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허리를 낮춰 겸손의 땅을 쳐다보는 사람은 하느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이웃과 참된 우정과 사랑을 얻을 것입니다.
글 _ 이창영 신부 (바오로, 대구대교구 대구가톨릭요양원 원장, 월간 꿈CUM 고문)
1991년 사제 수품. 이탈리아 로마 라테란대학교 대학원에서 윤리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교회의 사무국장과 매일신문사 사장, 가톨릭신문사 사장, 대구대교구 경산본당, 만촌1동본당 주임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