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꿈 CUM] 회개 _ 요나가 내게 말을 건네다 (12)
“당신의 눈앞에서 쫓겨난 이 몸.” (요나 2,5)
예전 본당 사목회 일로 열심히 봉사하던 형제님이 아주 슬프고 절망적인 글을 제게 보내셨습니다. “절대로, 다시는 성당에 나가지 않겠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느님은 찾지도 않겠다”는 비통한 심정의 글을 보내온 것입니다.
이유인즉, 자신의 온 생애 그토록 열심히 성당에 나갔고 봉사했으며, 하느님을 충실히 믿었는데 매번 사업에 실패하고 급기야 사랑하는 아내가 큰 교통사고를 당해 온몸이 갈가리 찢어져 몰골을 알아볼 수조차 없이 처참한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너무 큰 분노와 절망을 느꼈고, 이제는 하느님 존재마저 부정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믿음이 충실한 분이셨는데, 형제님의 글을 읽는 내내 절절히 아픈 느낌을 공감하며 저 또한 눈물이 나왔습니다.
어떤 형제자매님들은 절망적인 삶을 마주하게 되면 차마 견딜 수 없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럴 때는 저 또한 어떤 위로의 말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을 향한 탄식과 함께 조용한 침묵 속에서 절망에 빠진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도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반드시 고통과 절망의 나락에서 벗어나 희망을 사실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어느 목사의 아들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자기 아버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내용입니다.
지금 스탈린그라드에서 하느님에 대해 물음을 제기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부정한다는 뜻과 같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목자이십니다. 사람은 마지막 편지에서만큼은 진실만을, 적어도 최소한 진실이라고 믿는 것만을 쓴다고 합니다. 저는 모든 분화구에서, 허물어진 집에서, 모든 것에서, 모든 동료한테서 하느님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내 가슴이 그분을 향해 그토록 외칠 때에도 그분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집은 부서졌고, 동료들은 나처럼 용감한가 하면 비겁하기도 했고, 세상에는 배고픔과 살인이, 하늘에서는 폭탄과 불꽃이 쏟아졌습니다. 하느님만이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아닙니다. 아버지, 신은 없습니다. 설사 있다 해도 그것은 오로지 찬송가와 기도에나, 신부나 목사의 신심 깊은 말에나, 공허한 종소리와 향냄새 속에나 있을 뿐, 이 스탈린그라드에는 없습니다.”(요하네스 브란첸, 「고통이라는 걸림돌」, 바오로 딸, 16~17쪽)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전쟁의 포화 속에서 모든 것이 불타버리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잃어버리는 지옥을 체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운운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것인지, 그리고 이 목사의 아들 편지에 공감할 고통의 사람들이 아주 많을 것입니다. 과연 믿는 이들도 이 같은 고통 앞에서는 요나의 탄식이 나올 법합니다.
“당신의 눈앞에서 쫓겨난 이 몸.”(요나 2,5)
예전 어느 본당에 부임하여 이내 만난 훌륭한 자매님은 아직도 제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 자매님 구역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구역장이 공석이었던 관계로 제가 자매님께 구역장을 맡아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자매님은 정말 기쁘고 밝은 얼굴로 흔쾌히 구역장을 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본당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몰랐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매님은 말기암 환자였습니다. 그런데도 마지막 순간까지 기쁘게 최선을 다해 구역장 소임을 잘해 주셨습니다.
자매님께서 선종하시기 직전 병원 중환자실에 찾아가 함께 간 교우들과 기도를 마치고, 본당 성가대에서 오늘 자매님을 위해 간절히 부른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라는 성가라고 소개한 뒤 이어폰을 연결하여 귀에 꽂아 들려드렸더니 아주 거룩히 성가를 듣고 기쁜 얼굴로 감사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병실을 나오는 우리 모두에게 환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모두 안녕!”이라고 인사하며 손을 흔들어 주셨습니다. 자매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우리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자매님은 마치 천국에 오르시면서 우리에게 다시 만나자고 인사하는 듯 보였습니다.
너무도 처참한 고통 중에서 절망에 빠진 분들에게 차마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발 절망보다는 희망을 사시라고 간곡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처절한 고통의 주인공이었던 욥이 울부짖었던 희망의 목소리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욥 19,26)
다시 요나는 우리에게 말을 건네옵니다.
“인생에서 절망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 또한 죽음의 문턱에서 하느님께 울부짖었습니다. 진정 하느님의 이름은 ‘희망’이십니다. 희망이신 하느님을 끝까지 붙잡을 때, 우리는 그분의 손길을 또다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진정 고통은 하느님과 함께 희망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글 _ 배광하 신부 (치리아코, 춘천교구 미원본당 주임)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는 1992년 사제가 됐다.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그 교감을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삽화 _ 고(故) 구상렬 화백 (하상 바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