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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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 바이러스’에 노출되면 ‘진심 없는 진정성’에 감염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54. 진실 없는 ‘진실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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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상에 진실은 어디있을까? 어쩌면 세상 모든 생각을 단 두 개의 이념 속에 붕어빵처럼 찍어내어 승패를 가르려 하는 것은 아닐까. 붕어빵에도 붕어는 없고, 진실 게임에도 진실은 없다. 사진은 미국 선거방송 모습. OSV

수많은 뉴스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다. 종이 신문을 읽지 않으면서 오히려 디지털뉴스 바다에 묻혀 사는 느낌이다. 뉴스는 어둡고 불안하기까지 하다. 넘치는 방대한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게이트 키퍼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런 선택과 결정도 합당하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엘리 프레이저의 「생각 조종자들」에서 우리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 같지만, 우리의 생각 자체를 조정하는 위험한 집단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인식 자체가 왜곡될 수 있다는 무서운 말이다.

감기는 추워서 걸리는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에 의해 생긴다. 생각에도 바이러스가 침투된다. 질병을 옮기는 바이러스처럼 사람과 사람의 뇌 사이에 침투해 들어와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밈(meme, 인간 사유의 총체) 과학자인 리처드 브로디는 우리의 생각을 전염시키는 바이러스를 ‘마인드 바이러스(virus of the mind)라고 했다. 마인드 바이러스는 개인 신념이나 경험, 그리고 가치에 영향을 주면서 ‘진실’이란 믿음에도 균열을 만든다. 사실 의지와 무관하게 가짜를 진짜로, 거짓을 사실로 인지할 때가 있다. 실재와 그렇게 보이는 외양의 차이를 구별 못 하고 정말로 그러한 것인지,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과시용 혹은 위장된 진정성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 ‘진심’ 없는 ‘진정성’에 감염되어 가기도 한다.

‘내려놓음’. 요즘 종교인보다 정치인들이 더 많이 쓰는 말이다. 비움, 양보, 희생이라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단어 역시 ‘진심 마케팅’ 수단으로 사용된다. 언제부턴가 이익을 창출하는 기업의 광고에도, 권력을 쟁취하는 정치에서도 ‘진정성’이 중요한 시장가치로 떠오르고 있다. 진정성이 삶의 무대가 아닌, 시장이나 카메라 앞에 서게 되면 목적 달성을 위한 보여주기 수단이 된다. 진정성에 집착하는 이유는 가짜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도 많은 무차별 광고 시대에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믿게 해야 소비자의 선택을 받는다. 위선, 과장과 위장, 거짓이 도구가 되는 정치 역시 ‘진심’임을 보여줘야 선거에서 유권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 진정성을 전시하고 그 가치를 극대화시키면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기업 광고와 정치 선전이 꽤나 닮아있다. 진심은 없어도 진정성은 난무하다. 실체는 모르겠는데 과장과 위장을 넘나들면서 교묘하게 ‘진실’을 감춘다. 흥분을 먹고 사는 우리는 분노하고 감동하면서 어느 순간 1개의 진실만 있어도 99개의 거짓을 수용하는 너그러운 대중으로 길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집단을 전염시키는 마인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나도 모르게 ‘진심’이 없는 ‘진정성’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보이는 것이 너무도 강렬해서 보이지 않는 ‘진실’을 잊고 사는 것은 또 아닐까 하는 이런저런 의구심이 든다.

진정성은 전시 가능한 여러 개 중 하나가 아니다. 진정성은 하느님의 창조물인 본래의 나를 회복하고 싶은 열망에서 나온다. ‘진리’를 향한 내면의 진심이 말과 마음이 일치되었을 때 진정성이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 안에 머물면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요한 8,31-32)이라고 했다. 진리는 보이는 그대로를 입증하는 사실도, 이 사실에 대한 개인의 가치와 신념이 담긴 진실도 아니다. 진리는 말 그대로 참된 이치다.

중세 시대를 살아가는 이치와 지금의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는 다르다. 어렸을 때와 나이 들어서 살아가는 이치도 다르다. 그렇기에 진리를 따르려면 시대의 징표를 읽어내야 한다. 우리를 지배하는 힘의 정체를 날카롭게 꿰뚫어보면서 감시하고 견제하면서 복음적으로 평가하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면 지금 이 시대의 세리, 창녀, 나환자나 악령 들린 사람들이 누구인지 또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된다. 그때야 비로소 진심과 진정성이 만나고 억울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예수님의 메시지로 소통할 수 있다.



영성이 묻는 안부

총선이 다가와서 그런지 신문이나 라디오에 진실 게임을 하듯 치열하게 논쟁의 이슈들이 난무합니다. 사실 진실 게임에는 ‘진실’이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각을 단 두 개의 이념의 틀 속에 붕어빵처럼 찍어내어 승패를 가르려 합니다. 붕어빵에도 붕어는 없습니다. “태초의 장미는 이름은 없고 장미는 있었다. 이제는 장미의 이름만 남고 장미가 없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유명한 어록입니다.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수많은 이슈에서 ‘장미’의 실체는 없고 덧없는 이름만 무성하게 떠도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 복음으로 돌아가 지금 여기 디지털 세상에 살아계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진리’에 깨어 살아가기를 청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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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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