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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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3)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월간 꿈 CUM] 뿌리 _ 구약이 말을 건네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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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카프리섬 산 미켈레 성당 바닥의 마졸리카(Majolica, 이탈리아산 도자기) 작품, 에덴동산.


성경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태초의 창조 질서는 하느님 말씀에 의심을 품고, 그 말씀에 인간의 뜻을 첨가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유혹자였던 뱀, 그리고 하와와 아담으로 이어지는 의심은 몇 마디 대화와 암묵적인 동의로 서로 합의를 이루었다. 이렇게 하여 태초의 인류는 합심하여 죄를 지었고, 처음부터 죄는 공동체성을 띄게 된다. 뱀으로부터 시작한 하느님에 대한 이 의심에 대해, 그저 작은 것이었으며 하느님 말씀을 조금 바꾸어 몇 마디 첨가한 것뿐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결과는 놀라울 정도로 파괴적이었다.

선악과를 먹은 이후, 아담과 하와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급기야 에덴 동산이라는 삶의 자리에서 버려지는 고통을 받았다. 아마도 인간 안에 스며 있는, 가장 깊이 자리하고 있는 어두움인 ‘나 자신이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여기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담과 하와의 첫 아들이었던 카인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던 것도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준비한 제물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였고, 자신의 제물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것을 자신에 대한 거부와 배제로 이해하였다. 그렇게 하여 그는 아주 간단하게 자기 자신을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람’으로 스스로 규정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죄의 뿌리는 인간의 심리를 더 깊게 파고들었고, 자기 비하는 시기심과 섞이어 급기야 형제의 생명을 파괴시키는 폭력으로 이어졌다. 카인과 아벨, 노아의 홍수의 이야기는 당최 어떻게 멈추고, 어디서부터 제자리를 다시 잡아야할 지 모르는 죄와 고통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는 마치 우리가 우리의 무거운 죄 앞에서 안절부절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과연 인류는 어떻게 다시 태초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까? 과연 회복이란 가능한 것일까? 이러한 인류 회복의 길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시작된다. 아브라함은 일흔다섯 살에, 하란에서 주님께서 이른 대로 길을 떠났다.

태초의 세상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시작되었고, 그분께선 모든 피조물 가운데 당신의 말씀을 오직 인간에게만 전해주시며 소통하셨다.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후, 복을 내리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고 분명하게 전한다.(창세 1,28) 그러나 인간에게 전한 하느님의 이 축복의 말씀은 지금까지 실현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아브라함에게서 ‘말씀대로’ 실현되는 이야기가 처음 펼쳐진다.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이른 ‘대로’, 길을 떠났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도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이 살고 있었다.”(창세 12,6) 그리고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창세 12,7)

정리해보면, 아브라함은 하느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그분께서 보여줄 땅으로 향했으나, 그곳엔 이미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주님께선 그 땅을 아브라함 자신이 아닌, 그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브라함은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했을까?

아브라함이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맞이하게 된 세상은 유토피아적인 세상이 아니었다. 그곳은 지극히 현실적인 세상이었다. 오직 하느님과 함께 사는 곳도 아니었고, 하느님 말씀만 들으며 살아가면 되는 그런 곳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곳에서 그는 낯선 이방인이었고, 그곳의 문화와 삶을 배우고 듣고 익혀야만 했었다. 아브라함이 주님의 뜻에 따라 도달했던 곳은 지금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그런 세상이었다.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들의 이야기, 우리들이 체험하는 낯선 세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태초의 질서는 주님 말씀에 대한 순명 안에서 서서히 (매우 긴 시간을 흘러서) 회복되어 갈 것이다.


글 _ 오경택 신부 (안셀모, 춘천교구 성경 사목 담당 겸 교구장 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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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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