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꿈 CUM] 뿌리 _ 구약이 말을 건네다 (8)
야코포 밧사노(Jacopo Bassano) 작.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은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달하게 되고, 그때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다. 이는 하느님께서 “보여지다(?????, 니팔형태, Niphal Verb)”라는 어휘와 함께 최초로 직접 성경의 이야기에서 나타나시는 장면이다. 동일한 동사의 표현 안에서, 훗날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을 드러내실 것이다.(탈출 3,2) 이런 점만으로 볼 때도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이 부분은 중요한 의미를 구성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직접 나타나시어 약속의 말씀을 건네신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약속의 말씀들 가운데에서 가장 짧으면서 땅과 후손이라는 창세기의 중심 주제를 온전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창세 12,7)
훗날 여호수아기를 비롯한 역사서 전체의 중심 주제인 ‘약속의 땅’에 대한 언급은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처음 선포되었다. 그리스도교는 구원의 실질적인 역사를 아브라함으로부터 두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약속의 땅과 그 안에서 실현을 이루는 하느님의 구원이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계시헌장 14항 참조)
“내가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창세 12,7)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떠남에 대한 명령과 땅에 대한 약속에 대해 좀 더 살펴보면, 하느님께선 아브라함에게 7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땅’이라고 지목하신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향해 걸어오는 동안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인지 구체적으로 어느 장소인지 모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떠남이라는 하느님의 요청에 순명했지만, 사실 어느 땅에 머물러야 할지 정확하게 모른 채 걸어왔다.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의 순명은 떠나라는 명령의 완수가 아닌, 실행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사실 이는 우리에게 매우 깊은 묵상을 던져준다. 우린 사실 우리에게 요청된 복음의 명령에 대해 그것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인가를 두고 자주 고민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우리에게 선포된 복음적 가난과 나눔의 소명을 우리가 완수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 그것을 바로 실행하는 것이리라.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여 그 명령을 이행했던 결과는 사실 방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목적지가 있었다는 점에서 방황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본문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목적지를 알려주었다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본문의 맥락을 보면,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버지 테라가 도달하고자 했던 가나안 땅을 주님의 섭리라 믿고 추측하고 기도하며 떠났을 것이다.(창세 11,31 참조)
목적지가 없는 떠나라는 명령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아브라함은 하란에서부터 가나안 땅으로 도달하기까지 수백 킬로미터(대략 600km)의 여정 동안 도착지에 대한 막연한 상상 속에서 지내야만 했을 것이다. 이 부분은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없는 막연함 자체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하고 그것을 이행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아브라함은 알 수 없는 막연함만을 품은 채, 약속의 땅에 도착했다. 아브라함이 체험했을 알 수 없는 이 막연함은 결국 하느님의 섭리가 채우고 있지 않았던가.
글 _ 오경택 신부 (안셀모, 춘천교구 성경 사목 담당 겸 교구장 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