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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로의 피신 (마태 2,13-14)

[월간 꿈 CUM] 복음의 길 _ 제주 이시돌 피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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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네 칸타리니(simone cantarini, 1612~1648)의 ‘이집트 피신 중 휴식’(Le Repos pendant la fuite en egypt), 1635년작.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소장.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마태 2,13-14)

이 일이 일어났을 때 예수는 두 살이 채 안되었을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고향을 버리고 도망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예수 가족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부모는 아마도 그 당시의 위험에 대해 예수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는 그 경험을 그저 큰 모험으로 즐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고 있듯이, 그 사건으로 수많은 죄없은 아이들이 살해되었고, 이는 헤로데가 예수를 죽이려 하는 과정에서 발생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고 예수가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후, 그 학살의 진상에 대해 들었을 때, 어떻게 느끼셨을지 생각해봅니다. 예수는 그 대학살의 공포와 죽음에서 살아남았고, 이 때문에, 많이 괴로워하셨을 것입니다.

예수가 바로 이 때에 큰 죄책감을 갖게 되지는 않았을까요? 헤로데의 표적이었던 자신 때문에 그 지역의 수많은 아이들이 살해되었고, 홀로 살아남았던 그 끔찍한 기억에서 엄청난 가책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어릴 때의 이 고통스러운 경험이 예수를 다른 이들을 위한 삶으로 이끈 동기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1840년대, 아일랜드에서는 기근과 굶주림으로 수많은 이들이 죽음을 당했고, 그 안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죄책감에 시달렸고, 스스로를 가책했습니다. 따라서 전통적인 아일랜드춤은 스코틀랜드춤처럼 두 손과 팔을 역동적으로 흔들기 보다는 밑으로 내려 옆구리에 붙이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 의미는 그 당시 기근으로 죽은 이들을 향한 애도의 뜻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생존자들이 고통스러워했던 일종의 죄책감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런 고통스러운 체험은 아일랜드인들에게 현재까지도 기아나 굶주림의 현장에 가장 많은 후원을 해주는 민족으로 자라나게 했습니다. 또 다른 예는, 2010년 천안함 피격사건당시, 배에 함께 타고 있던 104명의 군인 중 46명이 죽었습니다. 한 생존 장병은 지금까지도 마음속으로 심한 가책을 느끼며, 차라리 그의 전우들과 같이 죽었으면 지금 겪고 있는 고통보다 덜 괴롭지 않았을까 라고 말했습니다.

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이 전쟁이나 폭력 또는 가난 등으로 그들의 고향땅을 버리고 피난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와 마리아, 요셉이 2000년 전에 죽음의 위협을 피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아마도 2000년 전 곤경에 빠진 예수와 그 부모에 대해 연민과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겠지만,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바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요? 아니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요?

예수는 우리 주위의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바로 그를 위해 해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에 대해 연민을 느낀다면, 그 감정을 구체적으로 난민들을 돕는 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예수와 그 부모, 다른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위협은 매우 실제적이기에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은 그저 위협들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걱정만으로 불필요하게 달아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 제대한 많은 군인들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전쟁에 대한 생각이 멈추지 않습니다. 즉, 그들이 군생활 동안 겪었던 정신적 충격과 상처는 전투에 대한 위험이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그들 주위를 맴돕니다.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며, 중독성을 지닌 약이나 술, 혹은 과잉행동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피하려고 합니다.


글 _ 이어돈 신부 (Michael Riordan,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제주교구 금악본당 주임, 성 이시돌 피정의 집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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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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