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영선 교수의 우리 성인을 만나다] 7.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
윤영선 작 ‘성 베르뇌 시메온’
출 생 | 1814년 프랑스 르망(Le Mans)
순 교 | 1866년(52세) 새남터 / 군문효수
신 분 | 주교 (제4대 조선대목구장)
한국이름 | 장경일(張敬一)
사도의 후예인 조선 주교 탄생
2월 22일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 베드로를 으뜸 사도로 세우셨다는 것과, 그와 그 후계자인 교황에게 세상 구원을 위한 교회의 최고 권위도 계승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도좌’는 곧 교황의 자리이고, 교황님을 이르기도 한다. 이날뿐 아니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축일이나 교황 주일, 여러 기도 끝에 교황님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것은 지상에 맡겨진 으뜸 사도의 소명이 얼마나 크고 힘겨운 지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
성 베드로의 ‘사도좌’처럼 사도들의 후계자에게 계승된 우리네 ‘주교좌’ 역시 인류 구원을 위한 힘겹고도 영예로운 소명이다. 우리나라는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되면서, 처음으로 사도의 후예인 조선 주교가 탄생했다. 박해받던 조선에는 1898년 명동에 성당이 세워지기까지 사도적 권위의 상징인 ‘주교좌’가 없었다. 하지만 ‘주교좌’의 거룩한 권한이 끊긴 적은 없었다. 순교하거나 지쳐 쓰러질지언정 백성의 구원을 위한 봉사의 권한을 포기하지 않았다.
10년간 한국인 영혼 구원에 헌신
첫 주교좌 명동대성당 미사에 참여했다. 성당 안 ‘주교좌’를 보며 베르뇌 성인을 떠올린 건 우연이 아니었다. 조선에 온 목적은 오로지 한국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그가 감옥에서 한 고백 때문이다. 2000년을 이어온 사도의 소명이 다시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10년 동안 조선의 주교로 이 땅을 샅샅이 누볐다. 주교는 화려한 제의 대신 거친 상복을 입었다. 모관 대신 방갓을, 목장 대신 죽장을 들고 수십 수백의 공소와 교우를 찾아 잠든 영혼을 일깨웠다. 사도의 후예 베르뇌에게 구원의 소명이 실현되는 조선의 영토는 이미 당신의 ‘주교좌’가 아니었을까.
베드로 사도처럼 당당하게 순교
베르뇌 주교는 한강 변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형장으로 향하던 그는 “우리가 조선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고!” 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사도의 소명이 완성되고 있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바랐던 으뜸 사도 베드로를 사도 베르뇌 역시 닮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는 바라던 대로 ‘다행히’ 조선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의 발걸음이 이 땅을 생동하는 주교좌가 되게 했듯이 그의 피가 대한민국을 거룩한 땅으로 만들었다. 성인은 오늘도 수많은 양 떼를 위해 당신의 주교좌인 이 땅에 착좌하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