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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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어떤 세상에서 더 오래 머물며 살고 있을까요?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58. 가상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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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과 현실이 혼합된 세상은 탈물체화와 탈신체화를 가속시킨다. 신체성이 없는 삶은 사람됨과 인간다움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OSV

“공감이나 댓글, 부탁합니다.” “구독과 좋아요, 눌러 주세요.” 블로그나 유튜브에서 쉽게 접하는 문구다. ‘공감’을 구걸하는 일이 디지털 시대에 필수가 되었다. ‘공감’은 ‘나도 그래, 나도 그렇게 느껴’라는 말이다. 그런데 너무도 쉽고 흔한 ‘공감’이 되어서일까? 영혼 없는 리액션이 난무하는 것 같다.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도 ‘클릭’만으로 가능하다. 굳이 공감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마음의 동요가 없고 울림이 없어도 ‘공감’을 표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공감하고 동감하면 딱 거기에 멈춘다. 더는 움직임이 없다.

감동(感動)은 움직인다. 감동하면 행동으로 옮겨져 나에게서 너에게로 건너가게 한다. 감동은 울림과 함께한다. 마음속 깊은 울림에서 찾아오는 감정이다. 울림은 어떤 물체에 부딪혀 반사되어 되돌아온다. 부딪히는 물리적인 실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만질 수 없는 허구의 환경인 디지털 공간은 파동을 매개해주는 울림이 없다. 빛의 속도로 곧바로 가야 하기에 어우르고 감싸 안아줄 매개는 오히려 소통에 방해가 된다. 세상은 소리로 가득하지만 모든 소리가 울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노래를 부를 때 목에서만 나오는 소리는 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배와 머리 등의 신체 내에서 어우르고 감싸는 소리의 진동은 공기 입자의 파동으로 바뀌어 널리 퍼지는 울림이 된다. 이는 몸과 영혼의 통교이기에 더 감동을 준다. 아무리 좋은 악기로 훌륭한 연주를 해낸다고 할지라도 통교할 수 없는 장소에서는 울림을 주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바닷가 언덕이나 고립된 동굴에서의 연주도 소음이 된다. 파동을 매개해주는 어떤 실존하는 물체와의 소통만이 울림이 되어 감동을 주고 행동으로 옮긴다.

“우리는 이제 땅과 하늘이 아니라 구글 어스와 클라우드에 거주한다.” 철학자 한병철의 「사물의 소멸」의 한 대목이다. 그는 ‘지금 우리는 탈사물화한 세상’, 그리고 ‘디지털 정보가 지배하는 유령 같은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어린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말도 하기 전에 스마트폰 세상에 흠뻑 빠져 살아간다. 말도 사물도 없는 상태에서 몸의 움직임도 없고 오로지 시각으로만 다가오는 허구의 세상을 맞이한다. 사물을 직접 보고 만지고 냄새 맡고 느끼는 체험보다 보는 것만으로 즐기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간다. 가상 세계인 ‘메타버스’에서 자신만의 ‘아바타’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여가를 즐기는 일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실이 되었다. 탈사물화, 탈신체화되어가는 세상이다.

꿈을 꾼다. 나비가 되어 꽃밭을 훨훨 난다. 그런데 깨어보니 사람이 되어 걷고 있다. 순간 장자는 자신이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자신이 된 것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하여 ‘호접지몽’이라 한다. ‘물아(物我)의 구별을 잊음’을 비유한 말이다. 그런데 꿈속에서 나비로 날아다니는 시간이 더 많아지면 걷는 현실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 물리적 한계를 벗어난 공간에서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다. 물리적 장소에서는 넘어지고 깨지고 아프고 불편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기회만 되면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스마트폰을 쥐여주는 모습을 자주 본다. 이들에게 현실은 꿈속의 나비로 돌아가기 위한 잠시의 건널목이 된 것일까? 어른이 되어서도 잠깐 사람으로 살고 오랜 시간 나비로 살고 싶어 하면 어쩌지? 나만의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공상과학 영화(SF)의 상상이 현실이 되어 가상과 현실이 혼재된 세상은 탈물체화와 탈신체화를 가속시킨다. 사물이 없지만 온몸으로 느끼고, 신체는 있지만 움직이지 않고 다양한 활동을 한다. 꿈은 현실이고 현실은 꿈이다. 단지 어떤 세상에서 더 오래 머무느냐에 따라 낯설고 익숙함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장소 없는 공간에서 학습된 기호와 감각으로 마음속 깊은 울림과 감동을 체험할 수는 없다. 신체성이 없는 삶은 사람됨과 인간다움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탈신체화된 이성은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 파스칼의 말이다. 온몸으로 느끼고 넘어지고 버티고 일어서며 살기보다 쉽고 빠른 가상의 현실에서 느끼는 것에만 익숙해지면 하느님과도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성이 묻는 안부

땅은 제 꼴을 갖추지 못하고 텅 비어 어둠이 가득합니다. 무거운 침묵 가운데 하느님의 영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스며들어오는 작은 기운은 거대한 파동이 되어 생명을 탄생시키는 울림의 전주곡으로 퍼져나갑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말씀은 파동을 타고 울림이 되어 잠자던 하늘과 땅을 쾅쾅 흔들어 깨우고 빛과 어둠을 갈라놓았지요. 땅 위엔 동물이, 물에는 생물이, 그리고 하늘에는 새들이 가득하고요. 그리고 세상 만물을 사랑으로 돌보라고 사람을 지어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이버 공간이 우리 인간이 숨 쉬며 소통하는 환경이며 대지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린 어떤 세상에서 더 오래 머물며 살고 있을까요? 하느님이 지어주신 하늘과 대지와 생명체, 그리고 나의 몸과 영혼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오 감미로워라. 나 외롭지 않고 온 세상 만물 향기와 빛으로. 피조물의 기쁨 찬미하는 여기 지극히 작은 이 몸 있음을.” 아시시 프란치스코 성인의 태양의 찬가가 더욱 그리운 세상입니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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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1장 17절
주님의 얼굴을 주님 종 위에 비추시고 주님의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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