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지 주일인 오늘은 겸손의 임금이신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것을 기념합니다. 오늘부터 성주간이 시작되고,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에 일어난 사건들을 전례 거행을 통해 기념하게 됩니다. 특별히 성삼일 동안에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이룩하신 하느님의 구원 신비를 깊이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수난기입니다. 그 내용에 의하면 예수님은 체포되어 유다인 최고 의회와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 두 번의 재판을 받았습니다. 유다교 지도자들로부터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거짓 예언자라는 죄목으로, 빌라도에 의해서는 반란을 선동하는 정치범으로 고발되어 심문을 받았고 그 결과로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예수님과 유다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당시 유다교 지도자들이 주장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율법과 성전 제사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에게 가차 없이 벌을 주시는 엄격한 심판관의 모습이었습니다. 육체의 병고를 비롯하여 인간이 현실에서 겪게 되는 불행과 재앙을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벌이라 여겼습니다. 그리고 창녀나 세리처럼 불경스런 일을 하거나,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이처럼 유다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을 단죄하고 벌하는 분으로 이해했고 그렇게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근본적으로 달라
이에 반해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아버지,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병자와 죄인을 다시 살리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가르침을 통해 누구라도 하느님 이름을 빌려 스스로 높은 사람으로 행세하거나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스스로를 낮추고 비워서 이웃을 측은히 여기며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스스로 유다교 지도자들이 죄인으로 낙인찍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활동은 유다교 지도자들에게는 하나의 도전이요 걸림돌이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진리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식민지를 무사히 통치함으로써 개인적인 출세와 이익을 얻고자 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어떠한 갈등이나 소동이 발생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식민지의 한 사람인 예수님을 희생시키는 것은 그에게 있어 대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유다교 지도자들이나 빌라도 총독과 달리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것이고, 무죄하신 분이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삶을 넘어서 하느님의 일을 추구하는 새로운 삶의 모습이 역사 안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고귀하고 참된 삶이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이웃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몸소 실천하시며 그 완성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수난기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른 것이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로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이기도 합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시며 당신의 외아들마저 기꺼이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성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유승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