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꿈 CUM] 꿈CUM 신앙칼럼 (15)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 작, 성 마리아 막달레나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Crucifixion with Mary Magdalen)
예수의 남자 제자선발 면접 용지에는 ‘충성도 평가’ 항목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르 14,50) 예수가 체포될 때, 그리고 십자가에서 홀로 외롭게 죽어갈 때, 그곳에 남자 제자들은 없었다. 심지어 한 제자는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옷을 벗고 알몸으로 달아나기도 했다.(마르 14,52 참조)
나 원 참….
그런데, 여자들은 달랐다. 그 맨 앞줄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있다. 당시 ‘마리아’는 흔한 이름이었다. 이 아이도 마리아, 저 아이도 마리아였다. 그래서 복음서는 그녀를 다른 마리아와 구별하기 위해 ‘막달레나’라는 칭호를 별도로 붙였다. 상당수 성서학자는 ‘막달레나’가 갈릴래아 호숫가의 작은 마을 이름에서 유래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막달라 마을 출신의 마리아’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다음의 해석이 더 끌린다. 당시 히브리어 ‘미그달’(migdal), 아람어 ‘마그달라’(magdalah)는 ‘위대한’ ‘훌륭한’의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레이트(great) 마리아’ 즉 ‘위대한 마리아’라는 것이다. 왜 성경은 그녀에게 ‘위대한’이라는 칭호를 부여했을까. 무엇이 그녀를 위대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요즘 서너 마리 마귀도 떼어내지 못해 가슴을 친다. 하지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를 만나면서 무려 일곱 마귀에서 벗어났고, 이후 확 달라진다. 그녀는 십자가의 길을 예수와 함께 걸었고(마태 27,56 참조) 예수의 유해가 안장되는 순간을 눈물 흘리며 지켜보았다.(마르 15,47 참조) 그리고 부활한 예수를 인류 최초로 목격했다.(마르 16,9; 요한 20,14-18 참조) 이처럼 위대한 마리아,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의 수난과 부활 신비의 정중앙을 관통하고 있다.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다. 일곱 마귀로 고통받던 가장 낮은 곳의 죄인이 거꾸로 위대한 인물이 됐다. 가장 죄가 많은 곳에 가장 큰 은총이 내렸다. 그렇다. 내가 겪는 지금 고통은 위대한 만남을 위한 치유 사다리가 될 것이다. 날카로운 백신 주삿바늘이 피부층을 뚫고 들어오는 그 아픔이, 나를 질병으로부터 보호할 것이다.
나는 믿는다. 내가 하루하루 고통을 극복하며 열심히 잘 살아서 창조주의 위대한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찾아오는 위대한 영광 때문에 내가 그나마 간신히 하루하루 작은 고통들을 보듬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위대한 영광의 작은 부스러기 조각이나마 내게 떨어졌으면 좋겠다. 내가 마리아 막달레나, 위대한 마리아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기도하는 이유다.
글 _ 우광호 발행인
원주교구 출신.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1994년부터 가톨릭 언론에 몸담아 가톨릭평화방송·가톨릭평화신문 기자와 가톨릭신문 취재부장, 월간 가톨릭 비타꼰 편집장 및 주간을 지냈다. 저서로 「유대인 이야기」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성당평전」, 엮은 책으로 「경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