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낳고 나서 한동안 울면서 보냈어요.” 어린아이를 안고 오랜만에 나타난 S의 말이다. 여느 산모가 그러하듯 호르몬의 변화나 육아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감이라 여겼다. 그런데 순간 ‘현대판 산후 우울증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를 바라볼 때마다 ‘이렇게 예쁜 우리 아기가 흙수저구나’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어요. 주변에 다른 사람들은 다 잘사는데?. 매일 눈물만 나더라고요.”
S는 남편이 직장에 나간 후 아기와 홀로 남겨진 자신이 불쌍해 보였단다. 그는 인스타그램 헤비유저다. 종종 찾아보는 SNS 친구들은 정말로 잘사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행복한 순간을 정지화면에 담은 주변 사람들의 모습은 부럽기만 했단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S는 칭얼거리는 아기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고 안쓰럽기까지 했다. 돌아와서도 그가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도 되고 궁금했다. 그러자 누군가 “S는 잘 지내요. 인스타 보세요”라고 말했다. 곧바로 인스타그램 친구 요청을 했고,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을 보니 며칠 전 우울감에 괴로워했던 S가 맞나 싶을 정도로 행복해 보였다. 비행기 비즈니스석에서 다정하게 아이와 함께 있는 모습과 강남 중심가의 옥상정원이 있는 게스트하우스, 그리고 여러 포즈로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도 보였다. 마치 “우리 아이, 금수저야!”라고 힘주어 말하듯 각종 쇼핑장과 스튜디오에서 모델처럼 찍은 사진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누군가는 지금 S의 인스타를 보면서 이렇게 한탄할 것 같았다. “남들은 다 잘 사는데, 우리 아이는 흙수저구나.”
보이는 것이 중요한 시대다. 그리고 보이기 위해 소비한다. 소비를 통해 ‘난 적어도 너와 달라!’라는 티내기 현상으로 차별하고 구별한다. 프랑스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말하는 현대판 ‘구별 짓기(distinction)’는 중산층이 선망하는 취향 집단을 형성하고 그 안에서 줄긋기를 한다. 현대의 자본에는 브랜드와 취향으로 드러내는 상징적 자본이란 것이 있다. 먹고 마시고 입고 걸치고 사는 브랜드 소비행위로 자신의 개성과 정체성을 보여준다. 소비는 이제 더 이상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주는 사회적 행위가 되었다. 소비로 공감하고 소비로 자신만의 취향을 드러낸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상징적 자본을 드러내는 것 중 하나가 ‘취향’이다. 브랜드로 취향을 드러내 차별화한다. 취향으로 남과 다름을 의도적으로 티 내면서 사회적 구별을 확실히 한다.
취향은 거대한 신념이나 이념과 달리 개인의 사소한 관심 방향이다. 어떤 대상이나 사물을 선호하는 마음이며 그것을 취하면서 자신만의 삶이 더 즐겁고 유쾌해진다. 하지만 오늘날의 취향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위치 곧 계급을 반영하는 상징 폭력이 되었다고 부르디외는 말한다. 듣기만 해도 ‘억’ 소리가 나는 부자들의 취향이나 취미생활은 가난한 자에게는 폭력처럼 다가온다. 명품으로 치장하고, 각종 예술품과 컬렉션을 소장하고, 남이 갖지 못하는 것을 소유하고, 남이 먹지 못하는 것을 먹는 소비행위로 자신들만의 취향을 드러낸다. 사실 취향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어떤 집단에서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고 소유하고 즐겼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부르디외의 말대로 결국 취향은 계급일 수밖에 없다.
서울대나 하버드대 이력과 의사·판사·검사라는 명칭 자체가 상징자본의 권위를 부여받는다. 유명인은 자연스럽게 빛나는 무대 중심에 올라서고 무명인은 어두운 관객석에서 무대 주인공을 선망하며 열광하는 구경꾼이 된다. 상징 자본의 권위 앞에 알아서 무릎 끓고 아픈 줄 모르며 상징 폭력에 굴복한다. 그런데 구경꾼이 무대 위에 설 방법은 신분 상승의 환상을 주는 명품 소비다. 그리고 탁월한 무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을 연출하게 해주는 인스타그램이다.
명품도 더 이상 탁월한 작품이나 예술품이 아니다. 고가의 사치품이고 심리적 만족감을 주는 기호다. 기호소비를 통해 부유하지 않아도 부유해 보이고, 괜찮은 내가 되는 기분을 소비하는 상징 자본이다. 이러한 상징 자본은 이미 우리 안에 깊숙이 들어와 차별적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상징 폭력은 소리 없이 경제적 약자들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다. 나는 과연 상징 폭력의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한 번쯤 멈춰 생각해볼 일이다.
영성이 묻는 안부
소비는 삶의 방식이며 문화가 되었습니다. 소비란 단지 상품을 사고파는 행위만을 의미하지는 않지요. 사회학자인 보드리야르는 ‘소비’란 가격표가 없는 시간·지위·매체·물과 공기까지, 써버리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매일 주고받는 문자와 카톡,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의 소통행위를 들여다보면 모두 소비 메커니즘 속에 이뤄지지요. 우리 일상 자체가 소비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소비하면서 존재감을 누리려다 보니 ‘더’를 반복하면서 탐욕이 들어옵니다. 소비의 ‘더’가 ‘덜’이 되면 좌절과 고통 속에 큰 결핍을 느끼지요. 소유물은 점점 나의 존재감으로 자리 잡고 마치 소유물이 나를 소유한 기분이 들지요. “소비에 집착하지 않고 깊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예언적이고 관상적인 생활방식”(「찬미받으소서」 222항)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