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꿈 CUM] 전대섭의 공감 (10)
업무상 본당 방문이 잦다. 덕분에 평일 미사에 참례하는 기회도 자주 생긴다. 코로나 이후 미사 전경 중 한 가지 눈에 띄는 변화가 보인다. 앞자리가 텅 빈다는 것이다. 주로 평일 미사 얘기다.
물론 전에도 그랬다. 신자들이 성당에서 앞자리보다 뒷자리를 선호하는 현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미사 전 봉사자들의 주된 임무도 늦게 온 교우들을 가급적 비어있는 앞자리로 안내하는 것이었으니까. 내 경험상 코로나로 급격히 줄었던 미사 참례자는 서서히 회복되는 듯한데 앞자리 공석률은 확연히 달라졌다.
교회에는 이런 모습을 두고 우스갯 소리가 있다. 금총, 은총, 눈총 논쟁(?)이다.
미사에 참례할 때 앞자리에 앉으면 금총을 받고, 중간쯤 앉으면 은총을, 뒷자리에 앉으면 눈총을 받는다는 말이다. 신자들의 자발적인 참례를 독려하려는 유머이겠지만, 텅 빈 앞자리를 지켜보며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도 참 힘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끔 어쩔 수 없이 앞자리에 앉아 미사나 다른 전례에 참례하다 보면 새로운 경험을 하곤 한다. 멀리서, 편안하게 보이던 제대 뒤 십자가가 눈앞에 웅장하게 펼쳐질 때 순간 당혹스럽다. 하지만 그런 순간도 잠시다. 가까이서 보는 제대와 장식 꽃들, 제대초의 촛불에 눈 맞추고 집전 사제의 표정까지 읽으며 강론을 듣고 전례에 집중하다 보면 참 그윽하고 거룩한 심정이 인다. 여러 번 경험한 사실이다.
그렇게 좋은데 성당에서는 왜 앞자리 앉기가 부담스러울까. 좋아하는 가수 공연 보러 가서는 그러지 않을 텐데. 예의범절을 앞세우는 유교적 배경 때문일까 싶기도 하다. 높은 사람 혹은 윗 사람 앞에 서는 것을 매우 외람되이 여기거나 좋더라도 한번쯤은 사양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것 말이다. 그리스도교 문화가 생활 속 깊이 스며들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물론 혼자 생각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제대 가까이서 그윽하고 거룩한 심정이 이는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은 앞자리를 탐내지(?) 않을까. 마치 자선을 한 번도 안해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한 사람은 없는 것처럼. 앞자리에 선착(先着)하려면 전례에 늦어서는 안될 일이다. 이게 선순환 아니겠는가.
그럴리야 없겠지만, 천국에서 하느님을 마주 볼 그 지복(至福)의 순간에도 눈총을 받지 않을까 걱정이다.
글 _ 전대섭 (바오로, 전 가톨릭신문 편집국장)
가톨릭신문에서 취재부장, 편집부장,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대학에서는 철학과 신학을 배웠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바보’라는 뜻의 ‘여기치’(如己癡)를 모토로 삼고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