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69. 빨간 손 줄까? 파란 손 줄까?
진실과 허상, 현실과 인공지능. 우리는 어떤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출처=unsplash
“빨간 손 줄까? 파란 손 줄까?” 어릴 적 누구나 들어봤음 직한 화장실 귀신 이야기다. 재래식 화장실을 이용하던 시절, 캄캄한 밤에 마당 끝 화장실에 홀로 있다는 것만으로 긴장되고 무서운 일이었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바람 소리만 들려도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진짜 변기 속에서 손이 나와 나를 끌어당길 것 같았던 그런 무서운 기억이 있다.
워쇼스키 형제가 제작한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주인공 네오는 빨간 약과 파란 약을 선택해야 하는 지점에 선다. 파란 약을 먹으면 보고 싶고,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며 안정감 있는 평범한 일상을 살 수 있다. 그것이 설사 거짓 현실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빨간 약을 먹으면 자신이 인공지능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진실을 깨닫는 과정은 엄청난 고통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물론 영화 속 영웅 네오는 빨간 약을 선택한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캡슐 속에 갇혀 안락하게 안주하며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마주한다.
거짓일 수 있지만 편리하게 안주할 수 있는 파란 약, 그리고 도전과 투쟁의 고난을 감당하면서 진실과 마주할 빨간 약을 선택해야 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허상이라고? 내가 느끼는 감각이 가짜라고?’ 현재 느끼고 믿는 것이 가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까? 지금의 편리한 시스템을 부정하고 완전 다른 낯선 세상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는 있는 걸까?
‘우리는 감각이 마비된 마음의 감옥에서 태어났고, 진실은 직접 경험해야 알 수 있다’고 영화 속 모피어스는 말한다. 가상의 세상인 매트릭스는 사람들의 의식을 통제하고 조정한다. 그런데 감옥일지라도 익숙하고 게다가 편안하기까지 하다면 갇혀 있다는 의식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냥 안주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사실 ‘마음의 감옥’은 실체가 없어 경계가 모호하다. 빨간 손이나 파란 손 따위는 없다고 믿으면서도,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공포감이 엄습해 온다. 드라마나 영화의 이야기가 허구인 줄 알면서도 눈물을 흘리고 분노하기도 한다. 심지어 거짓이라도 믿고 싶어하는 심리도 있다. 진실인지 아닌지 혹은 무엇을 믿고 믿지 않는지의 경계는 우리가 얼마나 감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경계가 모호하기에 직접 경험을 통한 진실을 알 수 없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인공지능은 인간이 진짜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마음의 감옥’에 가둬둔다. 인공지능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파랑이 아닌 빨강을 용기 있게 선택하여 마음 감옥을 탈출하는 일은 인공지능이 예측할 수 없는 ‘변수’이기에 위협적이다. 안락한 꿈 속에서 깨어나 탈출할 수 있는 인간의 도전은 인공지능을 뛰어넘는 탁월한 능력이다. 그렇기에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온갖 편의를 제공해주고 안락한 인공낙원이라는 감옥에 가둬두려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인공지능 개발과 사용에 대한 지혜’를 촉구하면서 “인공지능 시스템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믿게 하는 ‘인지적 오염’의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에 주의를 당부하고 있다. 기계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불편함 없이 일상이 편안하다면, 어쩌면 ‘진실’을 알게 하는 빨간 약을 먹어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반복적으로 수동적인 감각적 즐거움에 빠져 있다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때이다. “난 매트릭스에 잡혔구나.” “깨어라!(wake up)” 인간의 뇌와 마음을 지배하려는 매트릭스 세계는 감각적으로 반응하게 하는 가상의 현실이다. 하지만 익숙함이 자칫 현실이 되고 진실이 될 수도 있다.
가끔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저마다 손바닥 위의 기계를 보는 사람들의 표정을 볼 때, 마치 로봇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시간표에 의해 움직이는 우리 수도자들도 마찬가지다. 새벽에 일어나 로봇처럼 표정없는 얼굴로 미사 참여를 할 때, 기계적으로 시간 전례를 바칠 때, 파란 약만 먹고 사는 우리의 일상이 아닌지를 묻는다. 불편함이 없는 매일의 익숙한 프로그램과 인공지능 시스템과 무엇이 다른지를 고민해 본다.
영성이 묻는 안부
가끔 그런 질문을 합니다. “나는 마음의 감옥 속에 사는 것은 아닐까?”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마음의 감옥은 생각보다 참 편안합니다. 새로움이 없는 익숙함,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풍족한 일상이 자칫 ‘감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불편하면 불행하다는 생각, 그래서 현실은 편안해야만 행복하다는 생각, 이런 생각이 불편한 진실을 알게 하는 ‘빨간 약’을 선택하지 못하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파란 약을 먹고 안락한 인공낙원에서 사는 것이 무슨 죄냐고 저항하고 싶기도 하고요. ‘깨어라!’라는 성령의 소리가 내면 깊이 올라올 때, 바로 마음 감옥에서 탈출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빨간 손 줄까? 파란 손 줄까?’ 어쩌면 어릴 적 재래식 화장실에서 느꼈던 공포와 마주해야 할 것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