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72. 왜 타인과 갈등이 생길까
우리는 다름으로 인해 갈등하고 폭력을 행사한다. 이는 디지털 세상이나 현실에서나 마찬가지다. 사진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군인들이 적군을 향해 포를 쏘는 모습. OSV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김국환의 노래 ‘타타타’ 첫 구절이다. ‘내가 너를 안다’는 말보다 더 오만한 말이 있을까 싶다. 사실 ‘너’라는 타인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다. 우린 그저 나의 관점으로 타인을 이해할 뿐이다. 평생을 함께 살고 사랑한 배우자라도, 외모가 똑같은 쌍둥이로 태어났어도 모두 각자의 가치와 신념으로 남을 이해하고 세상을 바라본다.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사랑해서 가까이 다가가지만, 또 미워하면서 언제 이별할지 모를 일이다.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삶의 끝에 죽음이 있듯이 사랑 끝에 이별도 있다. 그 끝이 잠깐의 헤어짐이든 영원한 죽음이든 누구나 사랑하면 상처를 남기고 떠나야 한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알프레드 디 수자(Alfred D’Sousza)의 이 시구가 많은 이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린 상처받을 줄 알고, 이별할 줄 알면서도 기어이 사랑하고야 만다.
누구에게나 ‘사랑’은 절대적인 영혼의 음식이다. 사랑하고 사랑받아야만 한다. 그런데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면 성경은 물론 문학이나 대중가요도 온통 ‘사랑’의 고난을 이야기할까? 사랑은 ‘남’과 한다. 남은 나와 많이 다르다. 그래서 알 수 없고 고통스럽다. 그런데 또 노랫말처럼 ‘다 안다면 재미가 없다’. 달라서 갈등하고 고통을 겪지만, 그 ‘다름’으로 사랑은 더 단단해지고 커간다. 다름이 익숙함으로 건너가기까지 미운 정 고운 정이 섞이고 버무려지고 숙성하는 고난의 길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다름’은 낯설고 불편하다. 그래서 익숙한 ‘같음’으로 만들고 싶은 유혹이 종종 생긴다.
오늘날 우리는 삶을 완전히 바꾼 디지털 혁명의 초연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얼핏 자유롭고 다양성을 중시하는 세상같이 보인다. 그래서 다름을 많이 수용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과잉정보 세상이 다른 수많은 세상의 창을 더 열어주는 것 같아서 다름을 이해한다고 착각하게 한다.
하지만 디지털 세상은 더 철저하게 다름을 배척한다. 낯설고 불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은 아예 배제하고 내가 만든 내 취향의 세상을 만들어 거기서 거주한다. 디지털 세상은 온통 ‘닮은꼴 축제’의 공간이다. ‘좋아요’, ‘구독’을 누르고 팔로잉하면서 내 취향의 피드로 ‘같음’에 먹이를 주고 동일한 세상을 만들어간다.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을 응원하고, 나의 이념에 맞는 뉴스로 세상을 보고, 내 취향의 연예인이나 이슈를 따라간다. 똑같은 목소리로 같이 흥분하고 분노하고 또 사랑한다. 그리고 나와 다른 낯설고 불편한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이나 연예인과 동료들을 반대편으로 몰아세운다. 그들은 완벽한 ‘타인’이고 ‘적’이 된다.
우린 모두 세상의 이방인이다. 나에게 너는 남이고, 너에게 나도 남이다. 달라도 너무 다른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간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타인’은 없다. 단지 ‘내 입장에서’ 이해하고 ‘나 같으면’ 이렇게 저렇게 하리라는 예측을 할 뿐이다. 그렇기에 나에게 익숙한 나와 닮은 생각과 취향에 안주하고 싶어 한다.
우리 뇌는 특별하고 탁월하고 선한 것을 좇지 않고 ‘익숙함’을 선호한다. 가능하다면 내가 좋아하고 나와 생각이 같은 익숙한 것들 속에서 어울리고 싶다. 낯섦을 쫓아내고 익숙함을 좇는 본성을 강화시키는 디지털 세상에서 친구는 폭발적으로 늘고 그만큼 적도 많아진다.
왜 타인과 갈등이 생길까? 나와 생각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기에? 정확하게는 나의 이익을 대변하는 신념과 가치를 포기할 수 없을 때 갈등은 증폭된다. 전쟁은 왜 일어날까? 대한민국 남과 북의 갈등,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이는 모두 국가 간 이익 싸움이며, 정의와 도덕을 삼켜버리는 이기적인 집단의 광기다. 너의 다름을 나와 같은 것으로 만들려는 폭력이다.
‘타타타''. ‘있는 그대로의 것’이라는 의미다. 나의 이익을 좇는 관점 하나, 살포시 내려놓기만 해도 있는 그대로의 ‘남’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산다는 건 참 좋은 거’라는 달관의 경지에 이르는 첫걸음이 시작되리라.
영성이 묻는 안부
누군들 사랑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독히도 내 중심적이라서 ‘사랑’도 이기적으로 한답니다. 병으로 죽어가는 부모나 고통받는 배우자 혹은 가족 앞에서 무력하다고 느낀 적이 있을 겁니다. 내가 대신 아파 줄 수 없으니까요. 얼마나 아픈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나의 방식대로 해줄 수 있는 것을 다할 따름입니다. 자신의 아픔은 각자 감당해야 하듯 그렇게 우린 철저히 ‘남’일 수밖에 없나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사랑도 자기방식대로 하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일까요?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사랑의 매뉴얼을 주셨습니다. 게다가 지독하게 이기적인 나는 남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지만, 그 바람대로 남에게 해주는 것을 종종 잊고 삽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