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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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월간 꿈 CUM] 회개 _ 요나가 내게 말을 건네다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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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요나 3,3)

태초에 인간의 삶은 에덴동산의 낙원에서 행복으로 충만했지만, 이후의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며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원시 시대 인간은 먹고 사는 모든 문제가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야 하는 결단과 싸워야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추위를 견디기 위하여 동물의 가죽을 구해야 할 때도, 자신들보다 크고 무서운 짐승을 잡아야 했을 것이고, 먹는 문제도 과일이나 곡식보다 수렵을 통한 사냥에서 오는 두려움을 늘 안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겪는 모든 일들은 대개 처음 시도해 보는 일이었기에 낯설고 두려움이 가득 찬 피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론 호기심에 가득 찬 풍경도 연출되었을 것입니다.

가령 바닷가에서 굴이나 조개를 처음 본 원시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일까’ 갸우뚱거리며 잔뜩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을 모습과, 마침내 껍질을 깨뜨려 먹으면서도 생존을 위한 강인한 결단 뒤에는 걱정과 두려움이 늘 뒤엉켜 있었을 것입니다.

추위와 밤의 두려움을 피해 숨을 수 있는 공간의 문제, 거주지, 집의 문제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원시인들이 동굴 속에서 집단생활을 하며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모습 속에서도 늘 두려움의 경계가 떠나지 않습니다. 두려움을 피한 안락한 동굴마저도 인간이 쉽게 다가가도록 호락호락 내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맹수들이 먹이를 찾아 동굴 어귀를 기웃거렸을 것이고, 인간은 끊임없이 찾아오는 그 무서운 두려움과 싸워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 앞에 맞닥뜨린 공포의 무서움은 이미 경험하거나 습득된 것이 아닌 ‘처음’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더 컸던 것입니다.
 


때문에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만나게 된 광야, 그 낯선 곳에서의 두려움과 공포는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나아가 수많은 예언자들이 겪었을 낯선 환경과 처음 전해야 하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중압감, 백성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은 늘 그들 마음과 주변을 어둡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낯선 곳에서 복음을 전해야 했던 수많은 선교사들의 두려움 또한 이해 되고도 남습니다. 그래서 모든 선교사들의 맏형님 격인 바오로 사도는 그 같은 현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1코린 2,3)

사실 많은 종교학자들이 인간에게 종교가 생성된 근원을 ‘두려움’ 때문이라고 밝힌 사실도, 인간에게 있어서 두려움이 얼마나 존재 깊은 곳에 함께 있어 왔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 그 같은 두려움조차도 복음 선포의 선구자들은 더 크고 강하고 확신에 찬 예수님의 말씀에 다시금 용기를 가지고 떠날 수 있었고, 두려움에 맞설 수 있었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끊임없이 두렵고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하는 선교사들의 떨리는 마음, 때론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복음 선포를 위해 달릴 길을 끊임없이 달려야 했던 그들의 투철한 신앙의 정신에는 감동과 감사가 솟구쳐 오릅니다. 때문에 바오로 사도의 뜨거운 체험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의 힘이 됩니다.

“어느 날 밤 주님께서 환시 속에서 바오로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사도 18,9-10)

우리는 늘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떠난다는 것에 대한 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나 시작을 거침없이 해 나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거나 두려워하게 됩니다. 결국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현재의 자리에 만족하며 영영 안주해 버리고 맙니다. 떠난다는 것에 대한 낯섦과 두려움은 인간이 역사의 시작부터 지니고 있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공포와 두려움에만 갇혀 있었다면 인류는 결국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내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일어난 용기와 결단과 도전이 오늘의 인간 존재와 발전을, 나아가 인간의 구원을 가능케 만든 것입니다.

요나가 자기 민족을 짓밟은 두렵고 무섭고 거대한 나라, 아시리아의 심장인 수도 니네베에 가서 심판을 피하고 생명을 택하라는 하느님 명령을 실행하려고 했을 때의 두려움은 또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동행의 약속이 요나를 니네베로 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다시 말을 건네옵니다.

“제가 주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토록 달아나려 했던 이유는 그 크고 두려운 니네베로 가라는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떠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낯선 것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의 체험을 통하여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는 희망과 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진정 주님과 함께라면 세상 그 어떤 두려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글 _ 배광하 신부 (치리아코, 춘천교구 미원본당 주임)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는 1992년 사제가 됐다.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그 교감을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 아마추어 미술인 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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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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