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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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연중 제1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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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중심 주제입니다.(마르 1,1 참조)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자연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표상들을 ‘비유’로 들어 ‘하느님 나라’를 설명해 주셨습니다.(마르 4,33 참조) 오늘 복음에서 두 가지 비유를 만나는데, 그중 하나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에 관한 비유(마르 4,26-29)이고, 다른 하나는 겨자씨의 비유(마르 4,30-32)입니다.


‘비유’는 그리스어 ‘파라볼레’의 번역으로, 신약성경에서 사용되는 ‘파라볼레’는 하느님의 통치 혹은 행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에서 등장하는 ‘파라볼레’는 히브리어 ‘마샬’에서 어원적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마샬’은 ‘다스리다’라는 동사와 연관이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 저자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통치를 설명하기 위해 ‘비유’의 형식을 사용한 이유는 ‘파라볼레’에 대한 히브리어의 어원적 기원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먼저 첫 번째 비유를 살펴봅시다.(마르 4,26-29) 어떤 한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립니다. 그 사람은 이후 아무런 일을 하지 않지만, 씨앗은 성장하고 활동합니다.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 줄기가 나고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비록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말씀은 밭에 뿌려진 씨처럼 싹을 틔우고 줄기를 내고 이삭을 맺게 됩니다. 특별히 첫 번째 비유에서는 마지막 심판의 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확 때가 되어 곡식에 낫을 내는 농부를 언급하며 결정적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요한 묵시록에서도 ‘주님의 날’에 대한 전통적인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묵시 14,15)


이어서 두 번째 비유를 살펴봅시다.(마르 4,30-32) 씨앗이 땅에 뿌려지고 그 위에서 싹이 자라나는 과정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겨자씨는 직경 2밀리미터보다 작은 씨앗이지만, 높이가 3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나무로 성장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성장 과정 자체보다는 아주 작은 씨앗과 거대한 나무를 비교하는데 초점을 맞추면서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한 알의 작은 겨자씨처럼 당장에는 눈으로 보기 어려울지라도 나중에는 커다란 나무가 되어 이 세상 안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성장하는 과정은 하나의 기적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활동 안에서 하느님께서 활동하신다고 확신하셨고, 이러한 확신을 바탕으로 자연 속 작은 것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셨습니다.


겨자씨가 자라나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는 비유(마르 4,32)는 구약성경의 전통, 특별히 에제키엘 예언서의 비유적 예고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제 17,22-24)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심으신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에서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 온갖 새들과 들짐승이 깃들이게 될 것입니다. 향백나무는 새들과 들짐승이 깃들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나무의 종류에 속하는데, 목질이 견고하고 곧게 자라는 특성이 있어 주로 건축자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은 다윗의 후손, 곧 바빌론 1차 유배 당시 끌려간 여호야킨 임금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향백나무에 관한 짧은 비유를 통해 다윗 왕조의 회복과 번영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향백나무의 가지에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에제키엘 17장 23절의 말씀은 의구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향백나무는 본래 열매를 맺는 나무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서의 저자는 여기에서 하느님의 권능과 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향백나무는 과실수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하고자 하신다면 향백나무도 열매를 맺는 기적을 보여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합니다.(에제 36,35 참조)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하느님을 생명을 주관하시는 창조주로 소개합니다. 하느님 없이 세상 만물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살피시며, 그 안에서 현존하고 계십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고 약해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거대하고 강한 것이 되면서, 이러한 신비롭고 놀라운 변화에서 우리는 경이로운 하느님의 권능과 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연 속에 자신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진리가 숨겨져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직접 활동하시는 곳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매우 역설적입니다.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며 인간의 통찰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느님 나라는 늘 비밀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하려면 하느님의 도우심, 곧 신적 계시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통치가 가져올 변화를 수용하려는 자는 신비를 이해할 수 있지만, 저항하는 자에게 하느님 나라는 비유로 남아있을 것입니다.(마르 4,11-12 참조) 비유는 믿지 않는 이에게는 허구일 수 있지만, 믿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지혜이며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만물 안에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힘찬 어조로 고백한 그 믿음을 우리도 각자의 삶 안에서 고백합시다.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2코린 5,6ㄴ-7)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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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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