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꿈 CUM] 복음의 길 _ 제주 이시돌 피정 (3)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38-42)
제가 제주 이시돌 목장에 수의사로 봉사하고자 처음 ㅁ왔을 때, 한 직원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음식을 준비한 그 부인이 푸짐한 상차림을 끝내고 식사를 시작하기 직전, 그 부인은 부엌으로 사라졌고 나머지 사람들은 당연한 듯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아일랜드에서도 손님을 위한 준비는 여자가 다 하지만, 식사는 당연히 손님들과 함께했습니다. 만일 그때 그 부인이 식사를 같이하려 식탁에 앉았다면 다른 사람들이 엄청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일상적인 행위에 있어 어릴 때부터 받아온 가정교육이나 그 사회의 규범에 영향을 받습니다. 제가 처음 이곳에 온 이후로 남녀의 역할 인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만, 아직도 여전히 여자의 역할에 대한 왜곡된 견해가 남아 있습니다.
성경에 이 이야기가 담기고 나서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사람이(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포함해서) 마르타의 입장에 동조합니다. 여자는 음식을 준비하고 식사 시중드는 일을 해야 하는 존재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리아가 냉큼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언니 마르타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타는 예수가 동생을 꾸짖어주길 기대했겠지만,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아 실망했겠지요. 어느 면에서는 우리 역시 예수를 도덕적 심판관이라고 여깁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일에 곧잘 예수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 자신을 도덕 교사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평가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고, 또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예수는 사람들 일의 재판관이 되기를 요청받자 이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8,15)
최근에 교황 프란치스코는 게이인 사람이 영성체를 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답했습니다.
“제가 누구이기에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는 새로운 법규들을 만들러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오기 전에 유대교에는 보통 사람들은 다 지킬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규칙과 법규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 보여주고, 그분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할지를 알려 주려 오셨습니다.
예수는 마리아가 더 좋은 몫을 선택했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 말씀을 듣는 것이 좋은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교훈으로 자주 인용되기도 합니다. 들어주거나 기도하는 삶이 행동하는 삶보다 더 중요하다! 라는.
여러분은 이 말에 동의합니까? 예수가 하신 말이니 당연히 옳지 않은가 라며 동의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만이 진실일까요? 우리가 살면서 겪어온 경험들을 통해 한 번 성찰해 봅시다.
때때로 부모들은 마르타와 마찬가지로 자녀들을 위해 아주 많은 일들을 하느라 바쁘기에, 앉아서 자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합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다 양육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들이 그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경우가 꽤 됩니다. 부모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쏟아부은 시간이 결국 낭비였다고 후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만일 자녀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면, 자녀들을 먹이고 재우고 교육시키고 하는 그 모든 필요한 일을 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잘 들었을지라도 필요한 것들을 제대로 제공하지 못했더라면, 역시 그 점을 후회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이야기의 핵심이, 자리에 앉아 듣는 것과 시중드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가를 가르치는 데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는 당연히 둘 다 중요하겠지요. 사실 예수는 마르타에게 시중드는 것을 그만두고 자리에 앉아 들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봅시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이 장면을 상상해봅시다.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 발치에 앉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홀로 다니지 않았습니다. 제자들과 늘 함께했었지요. 그렇다면 그때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아마도 예수 발치에 앉아서 그의 말씀들을 듣고 있었을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제자들 사이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오로지 남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제자들 무리와 함께요. 그때 제자들은 파견 준비를 위해 필요한 가르침을 예수로부터 받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남자들은 여러 형태의 공식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반면, 여자들의 역할은 집안일이나 농사일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 발치에 앉음으로써 자신의 교육받을 권리와 또 예수의 제자가 될 권리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셈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예수가 마리아에게 좋은 몫을 선택했다고 한 것은 마리아가 그 당시 여자들에 대한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인 구속에 매이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말씀이었다고요.
마리아는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자신이 남자들과 다를 바 없음을 알아챈 것이고, 그래서 자신 역시 교육받을 권리와 제자가 될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고, 예수는 그것이 옳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는 이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처해 있는 부당한 사회적 관례를 깨뜨리고 또 모든 사람이 평등함을 보여줄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물고기는 물을 보지 못하고, 우리는 호흡하는 산소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고에 끼치는 문화적 영향력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우리는 삶의 방식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알고 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지금껏 해온 방식만이 옳다는 사고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합니다.
글 _ 이어돈 신부 (Michael Riordan,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제주교구 금악본당 주임, 성 이시돌 피정의 집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