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던 예수님께서 침몰할 위기에 빠진 배를 구하기 위해 바람과 호수를 잠잠하게 만드시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이런 초자연적 기적은 예수님이 갖는 ‘신성’(하느님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묵상은 이 같은 전통적인 해석을 넘어 또 다른 차원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새로운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복음서의 전체 맥락을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지난주와 이번 주 복음인 마르코 복음 4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 오늘 복음에 앞서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에게 가르침을 펼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가르친 내용은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것입니다. 먼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등불의 비유가 나오고 이후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가 나옵니다. 바로 지난주 복음이지요. 제자들은 군중들과 함께 열심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저녁이 되자 예수님이 타고 가르치시던 배와 다른 배들을 동원해서 호수를 건너다가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서운함이 있어 보입니다. 다 죽게 됐는데 걱정도 안 하고 혼자 태평하게 잠을 자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람과 호수를 잠잠하게 하신 후 오히려 제자들을 야단치는 듯 말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이 같은 예수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무엇을 겁내는가? 믿음이란 과연 어떤 것을 믿는 것인가?
무엇을 믿는가, 왜 믿는가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며,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그분의 뜻을 살아갈 때 구원을 얻기에 믿는 것입니다.
지난주 복음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따르면 하느님은 땅에 씨를 뿌리시는 분이며 그 씨가 저절로 자라나게 하는 분입니다. 그 열매를 수확하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또한 겨자씨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것을 통해 세상을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너무도 미약해 도저히 큰 나무가 될 것이라 믿기 어려운 것을 자라게 해 하늘의 새들이 그늘에 깃들게 하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라고 예수님은 알려주십니다.
묵상해 봅니다. 하느님은 항상 땅에 씨를 뿌리시는 분입니다. 땅은 바로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삶에서도 그분은 늘 당신을 사랑하고 따를 수 있는 씨를 뿌리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 삶이 내 기대와 바람대로 잘 풀릴 때도 씨를 뿌리시고 전혀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좌절할 때도 씨를 뿌리는 분이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나뿐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동료들에게도 그러하십니다. 더 나아가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 적대감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도 씨를 뿌리십니다. 우리는 정말 이런 하느님을 믿나요?
그렇게 뿌린 씨가 저절로 자라나 열매를 맺도록 하는 분도 하느님입니다. 다만, 그 씨가 길이나 돌밭,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일이 없도록 마음을 닦고 삶을 바꿔 가야 합니다. 이렇게 자란 열매를 걷는 것도 하느님의 몫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 삶의 열매를 내가 수확한다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밭에 뿌린 씨의 열매는 하느님이 거둬 가십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열매를 거두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나요?
하느님이 뿌린 씨는 참 작습니다. 마치 초라한 나의 모습과 능력처럼 미미합니다. 도저히 저런 모습과 능력으로는 뭔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런 작고 초라한 것을 통해 온 인류를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이렇게 일하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믿나요?
제자들은 어떤 하느님을 믿었을까요? 많은 경우 겁을 낸다는 것은 자신의 기대가 이뤄지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능력으로는 어려움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워집니다. 제자들은 호숫가에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지만 여전히 하느님을 모릅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만 자신들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려 했고, 자신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에 좌절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믿는다는 영어 동사 ‘Believe’는 사랑한다는 동사 ‘Love’와 어원이 같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냥 눈앞에 보이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갖게 되는 신뢰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는 질문은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느님을 진심으로 신뢰하며 살아가는 사람인지를 묻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내 경험 안에서, 내 바람 안에서 하느님을 믿고 판단하는 삶은 늘 두려움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을 느끼고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예수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뿌리입니다. 그렇기에 바람과 호수를 포함한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신뢰하고 사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지신 그 믿음을 나의 믿음으로 삼고 살도록 초대받은 제자들입니다. 쉽지 않은 일들이 많고, 감당하기 힘든 일도 벌어지고 스스로가 초라하게 여겨지는 순간도 일어나지만, 항상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살아야겠습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