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리’가 뭐예요?”
알파벳을 읽게 된 무렵, 부모님께 드린 질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누군가 느닷없이 ‘인리’가 뭐냐고 물으면 당황스러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인리’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질문은 바로 십자가 위에 적힌 문구, ‘INRI’를 보고 한 것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INRI는 단어의 첫 글자를 따온 약자이기 때문에 보통은 ‘인리’라고 읽지는 않습니다. 그럼 무얼 의미할까요?
INRI는 라틴어 ‘IESVS NAZARENVS REX IVDÆORVM’의 약자입니다.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뜻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을 때의 죄명입니다. 이 문구에 관해서는 모든 복음서에서 언급하고 있는데요. 특히 요한복음서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당시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죄명을 십자가 위에 달게 했는데 히브리어·라틴어·그리스어로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유다인들의 수석 사제들이 빌라도에게 ‘유다인들의 임금’이라 쓰지 말고 ‘‘나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하고 저자가 말했다’라고 고쳐야 한다고 항의했지만, 빌라도가 “한 번 썼으면 그만”이라면서 이 죄명을 그대로 붙였다고 합니다.(요한 19,19~22 참조)
마르코복음서는 “그분의 죄명 패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쓰여 있었다”(마르 15,26)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서에도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 예수다’(마태 27,37), 루카복음서에도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루카 23,38)라고 죄명이 쓰여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고는 있지만, 예수님의 죄명이 ‘임금’이었다는 점은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수석 사제들이 항의한 것처럼, 사형집행자 입장에서는 ‘임금’이라는 죄명은 ‘자칭 임금’이라는 의미로 적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에게는 ‘임금’이라는 말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임금님이라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보내시어,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시고, 모든 사람의 스승이요 임금이며 사제가 되고 하느님 자녀들 곧 새롭고 보편적인 백성의 머리가 되게 하셨다”고 가르칩니다.(「교회헌장」 13항)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이는 모두 세상을 다스리는 예수님의 왕직에 참여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는 이 왕직에 참여하는 방법이 나오는데요. 바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다스리는 것입니다.(786항) 십자가에 적힌 문구를 바라볼 때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고 하신 말씀을 되새겨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