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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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 현존의 타당성 (1)

[월간 꿈 CUM] 교리 _ 성체성사, 그 신비 속으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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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오르비에토 대성당의 성체 기적 경당 프레스코화

 


성체성사 안에서 빵을 모시는 신자들을 향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했다.

“너희는 너희가 보고 있는 이 빵을 먹는 것이 아니다.”(Non hoc corpus quod videtis manducaturi estis)

이 말 때문에 많은 이들이 성체 안에 그리스도의 몸이 실제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잘못 해석한 것에 따른 오류하고 말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의 본래 의미는 “그 빵이 물질적인 의미에서 우리에게 힘을 주는 빵이 아니라, 영신적 의미에서 우리를 소생시키고 힘을 주는 빵임을 말하고자 한 것”이라는 것이다.

성체성사에서 그리스도의 실재적이고 실체적인 현존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분은 어떻게 현존하는가?

이에 대하여 교회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실체변화’(Transubstantiatio)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교회는 빵과 포도주의 실체 전체가 그 외형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실체로 변화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실체변화’란 이 놀라운 변화에 붙여진 이름이다.

실체는 단순히 하나의 사물에 기초가 되는 것이고, 내적인 실체 또는 외적으로 인식이 가능한 외적 형태, 색깔, 무게, 맛 등의 이면에서 그 사물을 그 자체 안에서 구성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홍길동’을 예로 들자면, 홍길동은 나이가 들면서 외모와 생각, 지식이 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홍길동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 변하지 않는 것이 바로 실체이다.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변화되는 것은 말씀(verbum)의 일반적인 의미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미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변화된 후에 남아있는 인식 가능한 빵과 포도주의 외적인 모습을 우리는 ‘성체성사의 외형’ 또는 ‘형상들’(species)이라고 부른다.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실체변화의 사실과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그리스도의 임재는,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신앙 교의로 정의되었다. 이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만약 누구든지 성체성사 안에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함께 그대로 있다고 말하면서(실체가 변화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가톨릭교회가 매우 적절하게 이름하여 ‘실체변화’(Transubstantiatio)라고 일컫는 변화 즉, 빵의 전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또 포도주의 전 실체가 그리스도의 피로 변하는 오직 유일하고 기묘한 변화를 부인한다면, 그는 파문받을 것이다.”

전체의 온전한 그리스도 즉 주님의 몸, 피, 영혼 그리고 신성(神性)은 형상들(빵과 포도주)에 존재하고 있고, 그 형상들의 각 부분에 전체의 그리스도가 존재한다는 것이 신앙 교의이다. 축성의 말씀의 힘에 의해서(viverborum) 오직 그리스도의 몸은 빵의 형상 안에 존재하게 되고, 또한 그 피는 술의 형상 안에 존재하게 된다. 거기에 임재하는 그리스도는 불멸하며 그리고 더 이상 죽음이나 분리가 이루어질 수 없는, 영광스럽게 현양된 그리스도이다. 이리하여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체병’(concomitans)의 교의를 정립하였다.

성체 안에는 그리스도 전체가 임재하기 때문에 영광스럽게 된 몸의 모든 기능과 모든 특성들은 같은 척도의 양과 질을 지니며 어디서나 동일하게 현존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적으로 초자연적이고 유익하고 신비스런 방법의 현존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것을 “실체의 방법을 통하여”(in hoc sacramento per modum substantiac)라고 불렀다.

그리스도는 하늘을 떠나지 않는다. 그의 환경이나 상태는 변화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새로운 방법으로 즉 성사적으로 현존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가 전에는 있지 않았던 곳에, 하나의 감실(龕室) 속에서 모든 기능을 빼앗기고 홀로 남겨진 그러한 죄수가 아니다.

즉 우리는 성체 안에 계시는 그분을 축소화된 몸을 가지신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성체성사 안에서의 현존은 모든 사고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성체의 형상 아래 베일(veil)로서 자신을 감추는 현존(現存)이기 때문에 자연적인 현존은 아니다. 비록 이런 것으로 해서 우리가 예수를 성체의 변형 안에 있는 아주 작은 어린이로 볼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성체 안에서의 예수의 현존은 ‘신앙의 눈들’에 의해서만 분별될 수 있다. 불가사의한 성체 변화의 현상에서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은, 그것이 주체적으로 우리 안에 이루어지든지 또는 객관적으로 실재하든지 간에, 참 실재(the Real Presence)에 대한 신앙을 보충하는 표상(表象)만이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점은 그리스도는 연속적인 축성에 의해서 그 수가 증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쓴 책이 태워지거나 더 많이 인쇄된다고 하여 그 저자의 생각이 줄어들거나 증가하지 않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는 축성된 제병이 소비된다고 하여 감소되지 않으며, 새로운 제병이 축성된다고 하여 증가하지 않는다.


글 _ 전합수 신부 (가브리엘, 수원교구 북여주본당 주임)
1992년 사제수품.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한국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수원가톨릭대학교 대학원에서 성체성사를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수원교구 청소년국 청년성서부 초대 전담신부, 수원교구 하남, 본오동, 오전동, 송서, 매교동 본당 주임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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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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