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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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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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일해지는 어느 날이면, 일찍 일어나 장터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새벽 어스름을 깨고 전을 펴는 가운데, 끓어오르는 솥은 하얀 김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장터의 일상을 마음에 담다 보면 발걸음은 어물전에 이르고, 짠내가 덮쳐와 안일한 정신의 따귀를 칩니다. 제가 맡았던 어물전의 짠내는 생명이 넘치는 바다 냄새인가요, 죽음을 맞아 살이 썩어가는 고린내인가요. 물속을 춤추던 물고기들은 이제 나란히 누워 흐려져 가는 눈빛으로 대답합니다. 생선이 죽어야 산 사람이 밥을 먹지 않느냐고,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어느 서생이 말했습니다. 삶이란 “먹고 살기의 지옥을 헤매고 있는”(김훈 「라면을 끓이며」 중) 것이라고. 말없이 고개를 주억이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고요한 성당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렇게 밥을 먹고 살고 있을 겁니다.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장터에 다녀옵니다.


돌아온 자리에서 성서를 폅니다. 5000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마주합니다. 먹고 살기의 지옥을 헤매고 있는 사람에게,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요. 요한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이 이야기를, 다른 세 복음서도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네 복음서는 저마다의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겠지만, 복음서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온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5000명을 먹이신 기적’으로 읽는 이들에게, 이야기의 쟁점은 이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11절)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들은 배불리 먹었다.”(12절) 두 구절은 막 바로 이어집니다. 복음사가는 그 과정에 대해 조금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묘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빵을 나누고 남은 것을 거두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만 이야기하지요.


어떤 사람들은 이 행간을 줄여보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러합니다. 고대에는 지금처럼 숙박시설이나 요식업이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여정을 떠날 때 간단한 식량을 챙기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을 겁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찾아 나서면서, 긴 여정을 대비해서 먹을 것을 몰래 챙겨두고 있었겠지요. 그것은 생존과 직결된 사안이므로, 얼마만큼 식량을 챙겼는지 드러내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을 것이고요. 그러니까 군중들은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아이 하나가 자기 먹을 것을 꺼냈습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지요. 지금도 보리는 환영받지 못하지만, 예수님 시대에도 보리빵은 가난한 이들의 음식이었습니다. 물고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는 ‘옵살리온’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이는 상품 가치가 없어서, 어부들이 내다 버린 작은 물고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 가난한 아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가진 전부를 예수님께 내어놓았던 거지요. 순수한 마음을 간직한 가난한 아이 하나가 자기 가진 것을 내어놓으니, 그것을 본 사람들이 부끄러운 마음에 자기가 가진 것을 내어놓기 시작했고,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서 사람들이 내놓은 음식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이 사건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의 산물입니다. 살기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단시간에 마음이 바뀌었다는 것은, 빵이 많아졌다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지요. 그러나 이런 따뜻한 해석을 세차게 거절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대표적인 기적을 인간적인 문제로 끌어내리지 말라는 것이지요.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 물고기로 수천 명을 먹이신 일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것은 하느님 아들의 절대적인 힘으로 이루어진 일이므로, 그저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두 구절은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할 뿐, 행간의 진실은 여전히 멀고 아득합니다. “빵이 어떻게 많아지는가? 그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한가” 혹은 “남은 빵 열두 광주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던진 이런 질문으로는 답을 찾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복음서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빵의 늘어남이나, 그 숫자가 아닐 겁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전하기 위한 책입니다. 복음사가가 애써 이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유는 이 이야기로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내고자 함이었겠지요.


다시 복음서를 마주합니다. 나누어 먹은 빵과 남은 빵을 살피다가, 잊어먹은 예수님의 얼굴을 봅니다. 예수님은 왜 수천 명의 군중에게 빵과 물고기를 건네셨을까요. 한 끼 굶는다고 사람들이 죽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하셨던 분이 아니시던가요. 빵과 물고기를 통해, 예수님이 건네주시고자 한 것은, 정말 무엇이었을까요. ‘먹고 살기 위해 지옥을 헤매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전해주고자 하셨을까요.


세상이 아무리 좋아져도, 밥을 버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성당을 찾는 사람들은 밥을 벌기 위해 땀을 흘리고, 그 땀 내음은 바다 냄새와 고린내 사이 어딘가 있을 겁니다. 그렇게 성당을 찾은 분들에게,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예수님을 전하고 싶습니다. 풀이 많은 호숫가에 자리 잡게 하시고, 보잘것없은 음식이지만 저마다 원하는 대로 먹게 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에게 가만히 앉아 쉬시라고,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그 목소리를 들으며, 그 풍요로움을 누리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4-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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