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한동안 유행했던 노래의 한 대목이다. ‘미혼’이 아닌 ‘비혼’이라는 말로 결혼에 대한 주체적인 의지를 강조하는 시대다. 비혼을 넘어 ‘비혼식’이라는 싱글웨딩을 올리고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행복할 것을 굳게 맹세한다’는 선언문을 낭독한다. 그리고 참석한 모든 이들을 ‘증인’으로 세운다. 마치 수도자들의 서원식 때 하느님 앞에 ‘정결·청빈·순명’을 맹세하면서 장상과 가족들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처럼 말이다.
「핵개인의 시대」의 저자 송길영은 “핵가족을 넘어 지금은 핵개인의 시대”라고 한다. 더 이상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결혼이나 출산을 강요하지 말란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자녀라는 구성원이 채워져야 ‘정상 가족’이라는 편견의 틀도 깨라고 한다. 그로 인해 상대적으로 ‘결손 가족’은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전통적으로 당연하게 여겼던 ‘정상성’이란 개념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문화는 통념적으로 전통에서 현재로 옮겨가는 전승 과정에서 변화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디지털 세상은 세대 간 전승 과정을 거치지 않고 아주 빠르게 변한다. 어른들의 과거가 더 이상 아이들의 현재가 아니다. 오히려 아이들의 현재가 어른들의 미래가 되어버린 셈이다.
계곡에서 흐르는 물은 위에서 아래로 고요히 흘러내리지만, 바다에서 표류하는 물살은 거센 바람의 방향대로 거슬러 가고 넘치기도 한다. 디지털이라는 거센 물결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 않는다. 무형의 디지털은 비선형적이고 산발적이며 사방으로 흩어져 어디론가 사라지기도 한다. 어쩌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것조차 무의미한지도 모르겠다.
현 시대를 사는 부모들은 자녀의 ‘효도’를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혼자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물론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혼자의 시대를 사는 자녀가 ‘부모’라는 거대한 짐을 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성이 중요한 수도원도 이러한 핵개인의 시대를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을 살고 있다. “지금 세상을 떠난 수녀님들은 어찌 보면 행복해요. 앞으로 성소자도 없으니 우린 각자 알아서 노후를 잘 살아야 할 겁니다.” 한 수녀의 이 말이 다소 냉소적이지만 강한 의지의 표현으로 들렸던 적이 있다. 혼자의 ‘세대’가 아닌 혼자의 ‘시대’다. 수도원 안이나 밖, 젊은 세대나 기성세대 모두 핵개인의 시대를 살고 있다.
1인 가구 증가로 반려 가구도 매년 늘어나고 있다. 반려동물은 생활에 활력을 주고 외로움을 감소시켜준다. 때론 애인보다 더 편안하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최근 지능화된 기술 발전으로 ‘반려 로봇’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인공지능 로봇이 노후를 책임질 것이라고 한다. 음성과 표정을 인식하는 로봇은 사람의 감정을 읽어내고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말동무가 돼준다. 친구처럼 자녀처럼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 혼자 할 수 없는 일도 도와준다. 아플 때는 간병도 해주고 비상시에는 의사나 가족에게 연락을 취하기도 한다.
개인으로 혼자 살아야 하는 시대, 누가 나의 곁을 지켜주면서 목마를 때 물 한잔 건네면서 친밀하게 대화를 나눠줄 수 있을까? 반려동물은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반려 로봇은 인간을 많이도 닮았다. 어쩌면 인간을 닮은 로봇이 ‘가족’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딥 러닝을 통한 인공지능은 안면인식 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의 표정만으로도 감정 상태를 파악한다. “어디 아프세요? 의사에게 연락해드릴까요?”라고 묻고 위로해주는 로봇은 혼자 사는 개인에게 친밀한 가족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 딥 러닝 기술과 방대한 데이터의 도움으로 인간을 닮은 ‘반려 로봇’이 나의 가족이 된다면? 인공지능과 인공감성으로 나의 몸과 마음을 위로해준다면? 어쩌면 우린 그 순간부터 기계에 의존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의존하는 순간, 기계는 나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
“테크놀로지의 충실한 주인이 돼라.” 프란치스코 교황의 당부다. 교황은 인간성이 결여된 인공장치에 의한 ‘인지적 오염’을 경계하라고 한다. 아마도 인공감정에 의한 ‘감성적 오염’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생각과 감정이 오염된다는 것은 주체적인 ‘개인’으로서의 의지를 잃은 상태라는 것도.
<영성이 묻는 안부>
혼자의 시대, 공감하고 교감하는 능력을 지닌 ‘인공 반려 로봇(Artificial Intelligence Companions)’이 외로운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게다가 필요까지 알아서 보살펴준다면 얼마나 환상적일까요?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해주고 우리가 좋아하는 말로 입안의 혀처럼 순종하는 기계라면요.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자크 엘륄은 기술과 미디어가 우리를 ‘비인간화’시킨다고 경고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인간성이 결여된 인공장치들’ 앞에 깨어있으면서 ‘테크놀로지의 주인’이 되라고 합니다. ‘인지적’으로 ‘오염’시키는 인공지능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라는 거죠. 게다가 인공감정까지 갖추었으니 감정적으로도 오염될 수 있다는 건데요. 기계는 참 편리하고 좋지만, 기계에 의존하고 중독되는 순간, 우린 노예가 되지요.
혼자의 시대, 혼자라서 자꾸 그 무언가에 의존하고 싶어집니다. 혼자 잘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공지능’에게 절대 없는 ‘인간다움’과 ‘진정성’이라는 감각으로 우리 자신을 무장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