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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연중 제22주일·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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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중 제22주일이며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생명의 망으로 연결된 우리 ‘공동의 집’을 돌보라는 부르심을 기억하라는 초대의 날이며, 피조물 보호를 위해 이 시대의 예언자적 행동을 하도록 요구받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으로 그 가운데 특별히 ‘부정과 정결’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당대의 풍경이 선명하게 담긴 이 논쟁의 발단은, 제자들이 씻지 않은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유다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전통을 깨뜨린 제자들의 행동에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날을 세우며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자신들이 삶에서 철저하게 견제해 온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5)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행위가 문제인 것은 그것이 비위생적이어서가 아니라 비전통적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본뜻이 상실되고 맹목적으로 허상의 성채를 쌓는 모양새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숨겨진 위선과 오류를 가감 없이 드러내십니다. 먼저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시어 ‘입술’의 섬김과 ‘마음’의 섬김을 대조하시며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지적하십니다.


율법학자들은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이 ‘조상들의 전통’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전통’일 뿐이라고 하시며 전통의 권위를 다시금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들 전통의 근원이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음이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의 계명을 버렸다’라고 말씀하십니다.(7,8) 왜냐하면 그들이 ‘사람의 전통’에 따라 ‘코르반’이라며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대신 하느님께 드렸다’라고 외치지만, 정작 십계명의 ‘부모공경’을 외면하고 있음을 지적하시며 주객전도임을 명확히 하십니다. 사람이 정해 놓은 것에 집착하여 더 중요한 율법은 오히려 소홀히 하고 있다는 질책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사람의 전통’을 율법보다 앞세우는 그들의 위선이 밑바닥까지 들추어지는 것 같아 속 시원함을 느낍니다.


논쟁의 구체적 쟁점은 음식을 먹기 전 ‘손 씻는 것’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주제는 단순히 손을 씻는 것보다는 훨씬 원천적이고 광범위합니다. 도덕적 정결함의 근본을 말씀하시며 더 광범위한 주제로 이야기를 전환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7,15) 예수님의 이 논리에 따르면 손을 깨끗이 씻었다고 해서 사람이 반드시 정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사람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오히려 몸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 부정하게 만든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간단명료한 답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아가 ‘음식이 모두 깨끗하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손을 씻지 않은 행위가 음식에 그 어떤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아울러 음식이 모두 깨끗하기에 손을 씻지 않고 먹은 그 음식이 사람을 더럽힐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으로 나뉜 오래된 구분이 사라지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람 속에서 나오는’ 죄의 요소를 나열하십니다. 우리말 성경이 비록 날카롭게 짚어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리스어 성경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단수형,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은 복수형으로 표현합니다.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더 많고 악함을 드러내는 문학적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열두 개의 ‘악함’은 앞에 언급되는 여섯 개, 즉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악의는 자주 반복될 수 있는 행위를 나타내기에 복수형을 쓰고, 뒤에 언급되는 여섯 개, 즉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은 사람의 기질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단수형으로 표현하여 구분하고 있습니다.


‘겉’이나 형식이 아니라 모든 악행의 근원이 사람의 내면임을 명토 박아 말씀하시며, 겉으로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내면이 그렇지 못할 수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외적 행위에 집착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이율배반적 모습을 들춰내시며 그들의 헛된 자부심을 벗겨냄으로써 분리와 배척의 상징이었던 ‘정결’과 ‘거룩’의 의미를 새롭게 하시고 재정립하십니다.


‘외면’이 아니라 ‘내면을 돌보라’는 주님의 당부를 우리 삶의 공간에 옮겨봅니다. 우리의 ‘겉’과 ‘속’은 어떠한가요? 이 성찰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된 경건함’을 한 겹 한 겹 아프게 벗겨내는 과정은 우리를 더욱 성숙한 신앙인이 되게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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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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