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도 ‘귀먹고 말 더듬는 이’로 살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유학 시절입니다. 언어를 배우면서 현지 생활에 적응하던 시기에는 주위 사람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하고 싶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길거리에 산책을 나와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아이들, 심지어는 주인의 말을 알아듣는 강아지가 부러웠습니다.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는 분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귀먹고 말 더듬는 이가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갈릴래아 호수로 다시 돌아온 예수님께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바라는 것은 한 가지, 귀먹고 말 더듬는 이가 다시 듣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는 사람들의 바람에는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 주심으로써 병자가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있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누구인가요? 마르코 복음서 저자는 ‘귀먹은’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어 형용사 ‘코포스’(마르 7,32)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무딘’ 혹은 ‘둔한’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청각 장애를 가진 이들을 이방 민족과 연결지었는데, 이방 민족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이사 42,17-19; 43,8-9; 미카 7,16 참조) 이러한 연결점을 고려할 때,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려간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던 이방인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데려간 이는 들을 수 없었던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 저자는 ‘말을 더듬는’ 상태를 표현하고자 그리스어 형용사 ‘모길리오스’(마르 7,32)를 추가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형용사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마르코 복음 7장 32절에서만 등장합니다.(hapax legomenon) 이 단어는 이사야서 35장 6절의 칠십인역본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말할 수 없는 능력이 전혀 없는 상태를 표현합니다. 이러한 의미는 마르코 복음 7장 37절에서 언급된 “말못하는 이”, 곧 그리스어 ‘알랄루스’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가락을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면서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받은 병자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마르 7,35)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귀가 열림’, 그리고 ‘혀가 풀림’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치유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신적수동태)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게 예수님은 치유자이며 구원자이십니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마르 8,18 참조)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은 놀라서 말합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7) 사람들이 이처럼 놀란 것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치유가 특별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당시 이러한 기적 행위는 메시아가 오실 때 일어날 사건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생각하던 비현실적 사건이 실현될 것이라는 희망을 예고하였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이사 35,5-6: 제1독서) 오늘 복음은 눈먼 이들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의 귀가 열릴 것이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고 선포합니다.
기원전 8세기,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예언자의 심판 예고는 실현되었고, 이 결과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후 페르시아가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바빌론의 세력이 점차 약화되었는데, 이때 예언자(제2이사야)는 바빌론으로부터의 귀환과 예루살렘 재건을 예고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과 고향에로의 복귀가 임박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제1독서에서 불안과 두려움에 빠져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귀환과 재건의 희망을 알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미래 없는 멸망을 예고하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 안에 담긴 구원의 희망을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 멸망과 바빌론 유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망과 시련을 체험하도록 하셨지만, 그들을 바빌론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사하셨습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도 절망과 시련, 불안과 두려움에 빠져있었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음으로써 자유와 해방, 곧 구원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절망에 빠져 ‘어둔 밤’ 속에서 헤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이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겠지만, 그들의 장애는 단순히 하느님께서 내리신 심판의 결과로 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두움을 비추는 밝은 빛을 준비하고 계시며, 우리에게 그 빛을 바라보도록 초대하십니다. 저는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저의 귀를 열어주시고 혀를 풀어 말할 수 있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