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돌고 돌아 돌아오는데, 사랑은 돌고 돌아 떠나버리고, 추억을 돌고 돌아 멈춰 서있는 다시 그 계절이 왔나 봐 나 가을 타나 봐?.”
가을이면 이유 없이 공허하고 허전할 때 떠오르는 바이브의 노래, ‘가을 타나 봐’이다. 돌고 도는 것이 계절이라지만 이번 여름은 멈춰있는 듯 길고도 뜨거웠다. 방송 진행을 하면서 서둘러 가을 노래들을 대방출하였다. 여름을 빨리 보내고 가을맞이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기다리던 가을이지만 설레거나 흥분되기보다 기분이 가라앉고 차분해진다. 우울해지기도 하고 슬픈 감정도 찾아온다. 왜 그럴까?
물론 일조량이 감소하여 세로토닌이 저하되어 가을을 탄다는 과학적 분석이 있긴 하다. 하지만 힘없이 비틀대며 떨어지는 낙엽처럼 찾아오는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앞에 느끼는 경이로운 슬픔의 감정은 그 무엇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가끔은 낡은 흑백사진처럼 보이고, 혹은 지지직거리는 LP판 소리처럼 들리고, 때론 다이얼 공중전화 부스의 작은 공간으로 비집고 찾아오는 슬픔의 조각들이다. 고난의 시절도 가을이면 추억이고 그리움이 된다. 슬프지만 평온하고 심지어 황홀할 때도 있다.
슬픔이란 감정은 아름답다. 슬퍼하자. 단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1데살 4,13)는 말씀을 기억한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슬픔에는 좋은 슬픔과 나쁜 슬픔이 있다고 한다. “하느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를 자아내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좋은 슬픔이고, “현세적 슬픔은 죽음을 가져오는”(2코린 7,10) 나쁜 슬픔이다.
좋은 슬픔은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하면서 동시에 에고(ego)는 한 발 뒤로 물러선다. 거기에는 연민과 공감, 그리고 자비심과 회심의 눈물이 있다. 나쁜 슬픔에는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억울함과 분노 그리고 우울과 좌절의 눈물이 있다. 살레시오는 악마는 착한 사람을 유혹하는 데 나쁜 슬픔을 이용한다고 한다. 마음을 산란하고 불안하게 하고 공포에 휩싸이게 하여 더 이상 기도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좋은 슬픔은 기쁨만큼 자연스럽고 충분히 빛나고 아름답다.
“울음 우는 아이들, 가을 비, 아버지의 편지, 동물원에 잡힌 범의 불안, 가난한 노파의 눈물, 떨어진 광대, 죄수의 창백한 얼굴?.” 지금도 아련하게 기억되는 슬픈 언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저자 안톤 슈낙은 안타깝게도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한 문인이라며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은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이 경건한 슬픔의 대상 앞에서만큼은 욕망의 옷을 벗었으리라. 순수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관조의 시선으로 관상하였으리라. 바라보는 주변 대상은 살아나고 자신은 죽었으리라. 그렇게 믿고 싶다.
내 안의 욕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슬픔은 포악해진다. 나의 거대한 슬픔은 타자를 삼켜버린다. 욕망은 고통이다. 분별력도 잃고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린다. 나를 슬프게 하는 주변의 대상이 보일 리가 없다. 오로지 내 안의 슬픔에 잠식되어 허우적댈 뿐이다. 하지만 욕망을 비우고 오로지 있는 그대로 주변의 대상을 바라보면 슬픔은 관조가 되고 관상상태에서 나의 참 본성 안에 머물게 된다.
가을은 바야흐로 관상의 계절이다. 분주한 일상 안에서, 수많은 갈등과 걱정 속에서 찾아오는 슬픔을 잘 맞이하자. 욕심 없는 마음으로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게 손을 내밀자. 가을 탄다고 느낄 때 조금은 우울하게 가라앉은 마음을 바라본다. 그럴 때 결핍으로 아우성치던 욕망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주위를 돌아본다.
욕심 없는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머물 때 찾아오는 슬픔은 관조와 관상상태로 옮겨간다. 그렇게 우리를 슬프게 하는 수많은 것들 앞에서 겸허하게 바라본다. 순간 나는 사라지고 슬픔의 대상이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불현듯 황홀한 감정이 올라올 때도 있다. 주님과의 눈맞춤이 시작되고 말씀이 들려온다. 관상기도의 시작이다.
영성이 묻는 안부
‘울음 우는 아이’, ‘가을 비’, ‘아버지의 편지’. 제가 꼽은 슬픔의 단어입니다. “옆집 아이가 이제는 울지 않아요.” 그런데 가을의 선선한 바람에 이끌려 창문을 열었습니다. 순간 아이의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렸지요. 우리 수녀들은 서로 바라보며 웃었습니다. 어떻게 아이가 울지 않겠어요? 불볕더위를 막기 위해 창문을 굳게 닫고 아이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하고 살아온 지난한 여름이 슬펐습니다.
“멀리 기적이 우네~.” 덜컹거리며 천천히 움직이는 기차에 몸을 맡겼던 그 옛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염없이 창밖의 가을비를 바라보며 고요한 슬픔을 누렸지요. 지금은? 잦은 가을비로 차량관리와 빗길운전을 걱정합니다. 오염 물질로 인한 산성비는 가능하면 피하고 싶고요. 그 옛날 수련기 시절, 아버지가 보내온 편지도 참 슬펐습니다. 평소 느끼지 못했던 아버지의 짙은 사랑과 자상함이 고스란히 글속에 조용히 묻어있었습니다. 쓸쓸한 아버지의 뒷모습이 떠올라 슬펐습니다. 지금은 톡이나 문자로 주고받아서인지 사람의 향기와 슬픔이 묻어난 ‘편지’가 주는 기억이 아스라합니다. 그런데 슬프지만 아름답습니다. 욕심 없이 바라보면 슬퍼도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욕심을 비울 수만 있다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