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연중 제26주일이자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사회적 약자인 이주민과 난민을 ‘우리’ 안에 초대하여 ‘더욱더 넓은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촉구하는 날입니다. 이는 나와 다른 신앙, 사상, 행동방식을 가진 사람을 용인할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평화적 공존을 이루는 기본 원리는 관용과 배려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 모두는 관용을 베푸는 주체임과 동시에 관용의 대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더 넓은 우리’가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제자 요한은 예수님께 ‘우리 편이 아닌 한 사람이 스승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금지시켰다’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선한 의지를 지닌 사람을 ‘포용’하고 ‘용인’하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제자 공동체라는 범위를 한정 짓고 장벽을 쌓으려는 제자의 거부감을 중화시키며 넓은 마음을 지닐 것을 요구하십니다.
아울러 주님께서는 타인에 대한 포용에 이어 ‘죄를 가볍게 다루지 말라’라는 경고를 주시며 죄를 짓게 하는 손과 발 그리고 눈에 대한 무거운 말씀 가운데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손으로 짓는 죄, 발로 짓는 죄, 눈으로 짓는 죄에 대해 단호하고도 강렬한 세 가지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마르코에게 있어 제자 됨은 취사선택적 태도가 아닌 급진적이고 철저한 자세가 요구된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에서 재확인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죄를 거부해야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은 천국에 대한 말씀과 더불어 지옥에 대한 말씀 또한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만 하여도 ‘지옥’이라는 단어가 네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라자로와 부자의 비유(루카 16,19-24), 마태오의 산상수훈의 말씀들(5,22; 5,29-30), 이외의 여러 곳(마태 10,28; 24,41.46; 마르 8,36-38)에서도 지옥에 관한 언급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 속 지옥은 불이 타오르고 깊은 구렁텅이로 가로막혀 있으며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로 고통받는 장소입니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서 지옥은 뜨거운 불로 형벌을 받는 곳이며, 동시에 지옥의 가장 깊숙한 곳은 차디찬 얼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단테의 표현처럼 지옥은 가장 뜨거운 곳인 동시에 가장 차가운 곳인 것 같습니다.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는다는 점에서는 뜨거운 불길로 이해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점에서는 차디찬 곳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부류의 죄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하나는 타인을 죄짓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스스로 짓는 죄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남을 죄짓게 하는 잘못에 대해서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라고 무거운 말씀을 하십니다. 목에 맷돌을 달아 수장시키는 처형은 실제로 로마나 그리스 몇몇 도시에서 부모를 죽이거나 사회 도덕을 어지럽힌 사람에 대하여 시행되던 형벌입니다. 나귀나 짐승의 힘으로 돌려 곡식을 찧는 큰 맷돌인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지면 살아날 희망은 거의 없습니다. 바다에 수장될 경우 장례를 지낼 수 없어서 영혼이 영원히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고 여겼던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잔인한 사법적 형벌인 셈입니다.
죄악의 특성은 ‘공범 만들기’와 ‘확장성’에 있습니다. 나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타인까지 죄를 짓게 하는 것이니 그야말로 ‘곱빼기 죄’라고 하겠습니다.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는 그 대상이 명확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에는 신앙인이거나 혹은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까지 포함됩니다.
타인을 넘어지게 한 죄 다음에, 자기 스스로 죄를 짓는 경우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손이나 발이 죄짓게 하면 그것을 잘라버리고 눈이 죄짓게 하면 눈을 빼 던져 버리라는 다소 극단적인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신체를 절단하라는 말씀이라기보다는 현실감과 생동감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셈족 특유의 과장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죄의 싹을 자르라는 경고로써 손, 발, 눈이라는 우리의 소중한 지체를 포기할 만큼 생명에 들어가려고 힘쓰라는 교훈을 에둘러 표현한 것입니다.
스스로 조심하여 죄를 멀리하는 것뿐 아니라 행동과 말, 표양으로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 역시 피하라는 교훈이 신체 절단이라는 강렬하고 단호한 말씀으로 표현됩니다. 주님의 당부가 그만큼 간곡함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다소 거칠거칠하게 다가오는 강렬한 말씀이지만 우리가 걸림돌에 넘어지거나 스스로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애정 어린 눈빛이 진하게 담겨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결단만이 남았습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