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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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이야기 만들고 풀어내는 ‘이야기꾼’ 필요한 때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88. 서사가 있는 슬로우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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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각적이고 버려지는 스토리텔링이 넘쳐나는 현대 사회에서 구술로 전달된 이야기가 전달자의 목소리를 통해 공동체적 경험과 지속성을 갖고 있음을 다시금 상기해야 한다. OSV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자석처럼 다가가게 하고 마법처럼 빠져들게 했던 옛 이야기의 시작이다. 할머니의 할머니 또 그의 할머니로부터 전해 내려왔을 옛 이야기가 오금이 저리고 식은땀을 흘리게 한다. 수많은 이야기 중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내 다리 내놔”이다. 그 어떤 주술이나 유령이 나오는 오컬트 영화보다 더 무서웠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한 여인이 한밤중에 공동묘지에 가서 낫으로 시체의 다리를 뚝 잘라 들고 돌아온다. 그런데 시체가 벌떡 일어나 한쪽 발로 깡충깡충 뛰면서 ‘내 다리 내놔라’하며 쫓아온다.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지 않는가?

이야기는 시간의 연속성이라는 구조를 지닌다. 다 전달되지 않은 이야기에는 ‘틈’이란 것이 있다. 이야기의 흐름을 타면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틈’을 메워간다. 어쩌면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고 무섭다기보다 나만의 해석과 상상이 더욱 오들오들 떨게 했던 것 같다. 이야기에는 ‘사실’보다 ‘진실’이라는 것이 있다. 이야기는 무덤을 훼손한 여인을 분묘 발굴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사실’보다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아픈 가족을 살리려는 여인의 사랑에 대한 ‘진실’을 말한다. 그렇기에 하늘도 감동하여 다리가 산삼이 되고 묘지에는 시체가 아닌 잘린 산삼만 남아있었다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사랑의 힘을 보여주는 진실의 힘은 스스로 이야기의 틈을 메우고 해석하고 완결하면서 내 삶의 이야기로 걸어 들어온다.

오늘날 우리는 이야기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24시간 후에 만료되는 스토리를 게시했습니다.” 사라지기 전에 빨리 스토리를 확인해보라고 재촉한다. 머무르지 않고 사라지는 이야기,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파편화된 이야기를 소비한다. 늘 새로워야 하기에 이야기의 수명은 짧아지고 바로 잊히고 만다. 빠르고 짧게 자극만 주고 스쳐 지나가면서 나의 경험이나 이야기에 들어오지 못한다. 쏟아지는 싸라기눈처럼 잠시 머물다 녹아버린다. 이러한 이야기에는 해석하고 상상할 그 어떠한 ‘틈’이 없다. 이야기가 아닌 정보이기에 그렇다. 이야기는 화자와 청자의 교감이 있어 기억에 남는다. 이야기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생명력이 있고 나의 삶의 이야기에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정보는 찰나의 순간에 자극만 주고 떠나고 바로 잊힌다.

이야기에는 서사가 있다. 서사(narrative)의 어원은 ‘말하다’ ‘관계를 맺다’ ‘친숙하다’, 그리고 ‘알다’라는 단어에서 파생됐다고 한다. 서사는 청자와 화자의 거리를 친숙한 관계로 연결해준다. 이야기는 정보처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말하는 이의 이야기가 듣는 사람의 삶 속에 흘러들어가 자기만의 고유한 이야기로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바로 서사의 힘이다. 그러기엔 현시대의 이야기는 너무도 짧고 너무도 빠르다. 즉각적 스토리텔링이 넘쳐난다. 하지만 전달되자마자 바로 생명력을 잃고 잊히는 스토리텔링은 패스트 스토리이며 빠르게 만들어내고 빠르게 소비하고 빠르게 사라지는 한시적 게시물이다.

우리는 매일 이야기로 산다. 이야기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과학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증명할 수 없는 ‘허구’를 만들어내고, 또 그 ‘허구’에 실제처럼 빠져들면서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는다. 이야기를 통해 선과 악, 현실과 비현실, 인간과 괴물, 땅과 하늘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간다. 끊임없이 한계를 허물고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이야기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야기로 꿈을 꾸고 이야기로 도전하고 이야기로 즐긴다.

그런데 오늘날 유명인의 이야기나 소셜미디어 스토리로 인해 나의 이야기가 사라지고 있다. 대부분 지극히 개인적이고 파편적 이야기로 서사가 없는 정보다. 하지만 구술로 전달된 이야기는 단순한 괴담 차원을 넘어 전달자의 목소리를 통해 공동체적 경험과 지속성을 갖고 있다. 또 이야기의 ‘틈’을 나 스스로 메우고 창조하면서 가족과의 친밀한 관계가 과거에서 현재로 흘러들어온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에게 패스트 스토리가 아닌 슬로우 스토리를 자주 들려주었으면 한다. 조부모나 부모가 직접 구연하는 따뜻한 이야기로 천천히 머물면서 자신의 이야기로 완결해나가는 ‘틈’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진실한 이야기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꾼이야말로 디지털 시대에 필요한 인재가 아닐까 싶다.



<영성이 묻는 안부>

이상하게 똑같은 요리를 하는데도 며칠 후에 다시 하려면 기억이 나지 않아 검색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어머니로부터 배운 요리법은 기억이 날 뿐 아니라 어머니의 표정과 목소리, 그 음식에 얽힌 추억까지 함께 떠오릅니다. 저만의 진정성 있는 서사가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검색으로 터득한 요리법은 쉽게 찾은 정보라 일회용 소모품처럼 버려지고 잊히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기억했으면 합니다. 기억은 과거와 오늘을 연결해주고 아무리 아프고 고통스러운 경험이라도 새로운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시고 최후의 만찬에서 왜 당신을 기억하라고 당부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리운 사람·사건·사물에 대한 느낌을 기억을 통해 마음 안에 불러 모으면 그것은 그대로 나만의 이야기가 됩니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4-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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