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복음서의 마지막 이야기를 마주하며, 이란의 한 영화감독의 이야기를 주섬주섬 꺼내놓습니다. “관객에게 답을 알려주는 영화는 극장에서 끝이 날 것이다. 그러나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상영이 끝났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아스가르 파르하디,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 감독으로 유명하다.)
아마도 그 감독은 좋은 이야기는 열린 결말로 맺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말이 복음서에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부제 시절, 서울 어귀에 있는 정교회 성당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 일치와 종교 간 대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였지요.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자리한 성 니콜라스 대성당은, 길이가 같은 네 팔을 십자 모양으로 뻗고 앉아 푸른 돔을 쓰고 있었습니다. 네 복음서가 전해주는 예수님을 오롯이 담아내려는 듯, 네 기둥은 네 아치를 만들고 있었고, 성당의 천장과 벽면은 온통 이콘과 성화로 가득 차, 주님의 행적과 제자들의 이야기를 품어내고 있었지요.
그 수많은 성화와 이콘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정문 어귀의 내벽을 보시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벽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주님의 양옆에는 사도들과 여러 민족들이 자리하고 있는데요, 다양한 복색을 한 여러 인종이 있고, 그들 가운데는 치마저고리를 하고 쪽진 여성도 있습니다. 성당을 떠나려던 저는 그 벽 앞에서 조용히 말씀을 읊조렸지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사람들이 그 문을 다 건너갈 때까지 기다리며, 그 광경을 눈에 담아 마음에 간직해 두었습니다.
동방 형제들의 성당, 그 한쪽 벽을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하는 이유는, 그 쓸모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나가는 길에, 정문 내벽에 눈길을 주겠지요. 오늘날 로마 교회가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하시오!”(Ite missa est!) 하고 외치며 ‘파견’하듯, 동방 형제들은 모든 민족을 대표하는 이들을 벽면에 초대하여,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이콘 신학을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동방 형제들은 이콘을, ‘그림의 형태로 써 내려간 말씀’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동방 형제들의 그 성당은 하나의 복음서이고, 정문 내벽은 그 복음서의 마지막 장이었던 셈입니다.
그렇게 성당을 떠나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간직했을까요. 그 부제님들은 이제 사제품을 받으셨겠지요. 그분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계시며,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고 계실까요. 저는 복음서의 마지막을 마주할 때마다, 성 니콜라스 대성당의 벽면을 떠올려 왔습니다. 저는 이제야 복음서의 마지막 이야기가 다소 엉성하게 끝나는 이유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라는 선물은 신앙의 해답을 주는 책일까요. 분명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얼굴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만, 그러나 이 책은 우리에게 선명한 해답을 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애초에 신앙은 선명한 해답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추호의 의심도 없는 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더러는 의심했다는 고백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니까요. 오히려, 복음서는 해답을 주는 책이 아니라, 신앙인들에게 숙제를 주는 책입니다. 여전히 흔들리는 이들에게 사명을 주니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했던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요. 그들은 이 이야기의 끝에서 시작한 걸음을 어떻게 걸었고, 또 어떻게 멈추었을까요.
베드로는 소아시아(지금의 튀르키예)를 거쳐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박혔습니다. 안드레아는 러시아까지 선교를 가서 X형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큰 야고보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선교하다 예루살렘에서 목이 잘렸습니다. 필립보는 소아시아에서 선교하다 십자가에 달려 돌에 맞아 숨집니다. 바르톨로메오는 아르메니아를 선교하다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졌습니다. 토마스는 인도로, 마태오는 에티오피아로 갔다가 순교했습니다. 작은 야고보는 이집트에서 방망이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타대오는 페르시아에서 창에 찔려 순교했습니다. 시몬은 이집트를 거쳐 페르시아로 건너갔다가 톱에 잘려 순교했습니다. 요한은 순교하지 못했습니다만, 살아남은 유일한 사도로서 홀로 오랫동안 교회를 보살피며, 주님의 사랑을 증거했습니다.
머나먼 곳으로 선교를 떠났다가 순교로 마무리되는 이 이야기들은 전승으로 전해질 뿐, 복음서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실 복음서는 사도들의 부끄러운 자기 고백으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동안, 사실은 그분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끌어안고 나아가시는 동안, 예수님을 배신하고 부인하고 도망갔다고 고백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숨기고 싶은 이야기들,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골라서 복음서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주님을 마주 뵙고도 “더러는 의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부끄러운 자기 고백을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부끄러운 어제를 정직하고 겸손하게 고백하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복음서의 마침점 너머에서, 그들은 그런 삶을 살다가 자신의 신앙을 완성시켜 왔습니다.
복음서가 마침점을 찍어도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이어지는 일상에서 신앙의 이야기는 완성되겠지요. 신앙은 성당 안에서 시작되어, 일상에서 완성될 겁니다. 복음서를 덮으며 의심이 남아있어도 괜찮습니다. 첫 번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남은 숙제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때 끝없이 함께 해주실 주님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복음서의 마침점 너머에 우리의 일상도 이어질 겁니다. 우리도 열한 제자처럼 우리의 신앙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